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내복당

 

 

내복당은 각재 하항(河沆) 선생이 거처하던 곳으로, 선생과 그 후손들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80년에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창건하였다.

 

선생이 수곡의 옛집을 잠시 떠나 대각촌 각봉 앞에 띠집을 얽어 우거(寓居)하면서 자호하여 각재라 하고, 또 일신재를 일으켜 후진을 가르치니 배우는 자가 많았다. 만년에 수곡의 옛집으로 돌아와 그 당을 내복이라 하니 학도들이 또한 내복 선생이라고도 했다 한다. 그런 연유로 재호(齋號)를 내복당이라 했다.

 

 

내복당 중건기(來復堂重建記)

 

나의 종선조 각재 하 선생께서 가정 무술년에 탄생하셨으니 곧 조선 중종(中宗) 삼십삼 년이다. 의표가 헌정하고 지혜롭고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서 번거롭게 재촉하지 아니하여도 날마다 수권의 글을 외우시니 아버님 풍월헌공이 심히 사랑하시여 상주의 후계 김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뒤에 남명 선생이 덕산에 들어오시매 드디어 문인이 되어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성리 제서(性理諸書)를 받아 독실이 공부하시니 조 선생이 칭찬하여 나의 벗이라 하며 내가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 하였다. 이때에 오 덕계 최 수우당 김 동강 정 한강 같은 제현이 모두 문하에 있었으며, 선생이 날마다 더불어 정성껏 공부하니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다.

 

선생은 뛰어난 천품이 일찍부터 알려져서 덕행이 성열하니 그 청명하신 기상을 남명은 ‘눈 속의 매화 같다’하셨고, 그 정대한 기량을 덕계는 ‘매사에 침착하고 너그럽다’하셨고 그 확실한 절조를 한강은 ‘각재와 수우당은 비록 기상은 부동(不同)하나 대절(大節)에 다다라 빼앗을 수 없음은 각재도 또한 같으며 학문에 이르러서는 더욱 힘썼다’하셨고, 또 이르기를 도산의 조월천과 덕천의 내복당은 공문(孔門)의 안연(顔淵)이라 하였은즉, 이에 선생의 강명한 고덕을 가히 알겠다. 정묘년에 사마시에 장원하시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고 임천에 숨어서 경적만으로 스스로 즐기시니, 조정에서 그 어짊을 듣고 두 번이나 침랑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니 세사에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 임금을 생각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시사(時事)에 마음을 상하고 시속(時俗)을 근심하는 뜻이 왕왕히 음영(吟詠) 중에 나타나며 또한 일찍이 만언의 상소문으로 선도책을 폈었는데 애석하다. 그 글을 지금은 얻지 못한다.

 

선생이 대각촌 각봉 앞에 띠 짚을 얽어 자호(自號)를 각재라 하고, 또 일신재를 일으켜 후진을 가르치니 와서 배우는 자가 심히 많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당시의 급문 제현에 나의 선조 송정 선생과 사호(思湖) 오공(吳公)이 이름난 선비로 그 문장이 드러났다. 만년에 수곡의 옛집에 돌아오시어 그 당을 편하여 내복이라 하니 학자들이 또한 내복 선생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16년에 여러 문인들이 우러러 사모함을 그치지 아니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코자 일향에 의논하니 일향이 모두 잘한다 하고 이웃 고을 역시 옳다 하기에 드디어 대각서원을 세우니 그 땅은 선생 정사(精舍) 일신재의 옛터이다. 고종 초년에 나라의 금지로 서원을 철폐한 뒤 원지에 동쪽 바라보이는 곳에 유허비를 세워 경앙의 정성을 다하고, 광복 후 무자 년에 원지에서 서쪽으로 일령을 넘어 대각서원을 다시 세워 차례로써 제사 하니라. 지난 신유년에 제족이 합모하여 탄성갈력(殫誠竭力)으로 사칸 집을 선생께서 사시던 옛터에 짓고 그 옛 편액을 걸었음은 선대의 자취를 소중히 함이다.

 

그 규모의 화려하고 화려하지 못함을 말할 것이 아니라 또한 효심의 면면함이 아니면 어찌 이 일이 이루어졌겠는가! 화려하여 마지않는다. 주손 영청(泳淸)이 그릇 알고 두근(斗根)에게 기문을 촉탁하거늘, 생각건대 소말한 후손이 글도 모르면서 그 어찌 선생 덕행의 만분의 일인들 헤아려 본뜨랴? 굳이 사양하였으나 부득하여 망설이다가 그 참람하고 외람됨을 잊어버리고 정성 들여 선현들 서술한 문자 중에서 주워 모아 성편하여 어진 후손들의 요청에 보답하노라.

선생 몰 후(歿後) 사백 년(四百年) 기사(己巳, 1989년) 5월 상완(上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