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낙수암

 

 

낙수암

 

진주시 수곡면 사곡의 낙수암(落水巖)은 송정 하수일 선생이 즐겨 찾아 노닐던 곳이며 후손들이 계곡 서쪽 기슭에 재실을 세워 낙수암(落水庵)이라 하고 공을 기리고 있다. 낙수암 골에는 재실 낙수암, 함청헌, 그리고 시조공 사우였던 옛 경절사가 있다.

 

 

낙수암기(落水菴記)

 

진주 서쪽 방장산 아래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낙수암(落水巖)이라 한다. 파남산의 물줄기가 오리쯤 남으로 굽어 흐르다가 골짜기에 이르러 수십 척의 절벽에 다다라서는 홀연히 놀란듯한 여울이 마치 공중에 걸린 무지개처럼 거꾸로 쏟아지는데 그 아래 반석이 이를 받는다. 그래서 이름한 것이다.

소경왕(宣祖) 15년에 우리 선조 송정 선생이 종제 동정(東亭, 휘 鏡昭) 공과 오월(梧月) 이공(李公, 휘 惟諴)으로 더불어 이곳에 노닐었는데 당시에는 재실이 없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 선생의 5세손 태와공(台窩公, 휘 必淸)이 옛 각봉재를 낙수암 오른쪽 평탄한 곳으로 옮겨 왔으니, 그 상량문에 이른바 ‘낙수암의 기슭에 자리 잡아 각봉재를 중건하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로 각봉재는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우리 고을의 목사로 있을 때 창건한 네 곳 재실 중의 하나로 정랑부군(휘 沔)과 내복 선생(휘 沆)이 재장(齋長)을 역임하였다 한다. 대저 이 낙수암은 송정 선생이 오월(梧月)의 은거처로 복지하였으나 이공(李公)이 재실을 짓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진주 서쪽지방 선비들이 모두 아는 바이며 풀밭으로 방치된 지 오래되었다. 이에 경치의 뛰어남을 말미암아 옛 모양을 복원하고 맑은 물 높은 산과 울창한 숲 어지러운 돌로 우리 집안 대대로 지켜가는 이름난 동산으로 삼았으니 마치 장 씨가 영벽에 정원을 소유하고 이 씨가 평천장(平泉莊)을 지킨 것과 같다. 그 후 누차 흥폐를 겪어 규모와 제도가 한결같지 아니하고 이름도 따라서 달라졌다. 각봉이 맨 처음 이름이었는데 역락재라 고쳤고 또 뒤에 역락을 고쳐 지금의 이름이 되었으며 옥류거사 이삼만(李三晩)이 편액을 써 문미(門楣)를 치장하였다. 우리 선왕고 함와공이 또 특별히 삼간집을 지어 계상(溪上)에 우뚝이 안치하였으니 이 암자를 더욱 빛냄이요, 만년에 그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함청헌이라 이름 하니 또한 옥류거사의 필체이다. 그 북쪽에 고려 문하시랑공의 별사가 있는데 선군 묵와공(휘 啓賢)이 처음 시작했고 조카 선공감역 재곤(載崑)이 이어 지붕을 얹었다. 대종가 후손 영규가 사사(祀事)를 주관해 오는데 대개 의리에 근본을 두고 시작했다.

 

재사(齋舍)가 오래되어 풍우를 가릴 수 없더니 지난 해 섣달 향사를 마치고 제종(諸宗)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선조에게 향화를 드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선배들의 아름다운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세상은 또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변하므로 중수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이에 올 기유년(1909년) 봄에 목수를 부르고 재목을 운반하여 그 낡은 것을 갈고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서쪽에 방 두 칸을 넣어 학생을 거처하게 하니 관선실(觀善室)이라 하고 중앙은 마루를 넣었고 그 북쪽을 나누어 제기를 보관하니 추원헌이다. 총 사간으로 그 역사를 주관한 이는 헌진과 영규이다. 가을에 낙성하고 나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니 내 늙고 글재주 없지만 잠시 그 시종을 기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상고하게 하려는데 가능할지? 이에 기문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