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애각재

 

 

애각재

 

송정공 수일(受一)의 차자(次子) 찬(瓚)과 그 후손들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구 재실을 1930년에 수곡면 대천리 구태동에 창건하여 60여 년이 지난 뒤 재실이 협소하고 퇴락하여 1991년에 후손들의 뜻을 모아 이곳 사곡동 양지에 자리를 잡아 이건(移建)하였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제3 토요일 일요일 양일간이다.

 

 

애각재기(愛慤齋記)

 

옛날 선조 인조 때 처사 하공은 휘가 찬(瓚)이요, 자(字)가 중진(仲珍)이니, 곧 송정 선생 중자이시다. 진주 서쪽의 정곡에서 태어나 분가함에 즈음하여 비로소 사곡에 거하게 되니 하 씨가 이곳에 거하게 됨은 이때부터다. 자손이 백년간 이 터를 수호하다가 증손 대에 이르러 구태로 옮긴 후로 지금토록 기거하니 이 땅은 사곡과의 사이에 한 재를 끼고 있다. 공의 묘는 귀곡산 손좌에 위치하며 공의 아들 자징, 자호, 자혼의 묘도 또한 근방에 있어 자손들이 정성껏 세제를 받들어 왔으나 일찍이 재사 없음을 한하여 사옥경진(社屋庚辰, 1940년)에 애각재를 창건하고, 사부자의 분암(墳菴)으로 삼았으니 이제 오십여 년이다. 그런데 구재(舊齋)가 협소하고 또한 오래되어 퇴락하므로 광복 신미년 봄에 옛터에 중건하려 하였으나, 마침 백파(伯派) 종손 병태의 권유로 문득 사곡의 양지에 자리 잡고 종전보다 광대하게 건축하여 일 년 후에 완성하니 높다란 모릿대는 공중에 치솟고 주변 산천이 감싸니 더욱 빛났다. 그 규모는 5칸이며 재호(齋號)는 전과 같다. 대개 고향에 짓지 않고 이곳에 지은 것은 공의 복거한 뜻을 잊지 않아서이다. 낙성에 미쳐 후계 재신, 영석, 창근이 그 연혁을 기록하여 인찬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쓰기를, 애(愛)를 지극히 하면 선령이 존재하고, 각(慤)을 지극히 하면 나타난다는 말은 무엇을 이르는가? 그 친제(親祭)에 있어 비록 부모의 의용(儀容)을 보고자하나 볼 수 없음은 누구에게나 한(恨)이 된다. 이에 불망(不忘)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마침내 의용을 갱장(羹墻)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같이 하면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게 되고 나타나지 않으나 나타나게 되어 사친의 염(念)이 성하게 일어난다. 친제를 이같이 지내야 한다면 선조의 제사에도 또한 이와 같으며, 묘제(廟祭)를 이와 같이 지낸다면 묘제(墓祭)에도 이와 같이 지내야 된다. 혹자는 이르기를 ‘선조의 제사를 받들되 생전에 뵙지 못하여 그 의용(儀容)을 알지 못하니 비록 모앙(慕仰)하여 잊지 않으려 하나,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응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추모함이 지극하면 알지 못하나 알 수 있게 되고, 잊어도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직 심지(心志)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선조(先祖)의 심지는 반드시 가전(家傳)의 규범이 되어 장구(長久)하여도 불멸하니 그 후예(後裔) 되는 이가 어찌 그 심지를 거울삼아 깊이 사모하지 않을쏘냐. 이것이 애각(愛慤)의 요체(要諦)이다.

 

생각건대 송정의 학문은 각재에 근원하고 각재의 학문은 남명에 근원하니 그러면 공의 학문은 곧 남명이 연원이다. 공이 경사를 두루 읽어 사람의 도리와 사물의 이치를 색구하고 애친과 경형에 힘쓰며 선조를 받드는 정성이 독실하고, 사소한 일에도 충직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공경하고 신중하였으니 하겸재가 이른바 감동이 뼈에 스며든다고 함은 이것 때문이다. 어찌 절약하고 근면할 뿐이겠는가? 세 아들로 하여금 겸재문(謙齋門)에 수학하게 하여 글 읽는 소리가 날마다 성하더니 그 증손 지명당 세응에 이르러 마침내 대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뿌리 깊은 나무는 지엽이 반드시 무성하고, 덕을 쌓은 군자는 후견이 반드시 창대하다 하니 그 이치를 속일 수 없다. 세삼 도의가 쇠퇴하면서부터 운이 옛날만 못하나 그러나 여음의 발함이 아직 미진하니 앞으로 창성할 것이 조명하다. 하씨 제공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이 역사에 부지를 희사한 이는 방손 병석(炳奭)이다.

1992年 임신(壬申) 춘분절(春分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