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원모재

 

 

원모재

 

원모재는 호군공의 6세손 영모재 휘 재정(再淨)의 셋째 아들이신 찰방공 휘 윤성(潤城) 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65년에 후손 재극(載極) 재신(載信) 재균(載均) 재근(載謹) 등 여러 종원들이 뜻을 모아 마을 남향 언덕에 네 칸 집을 세우고 원모라는 편액을 달았다.

 

 

원모재기(遠慕齋記)

 

밀양의 대항에는 진양하씨가 많이 세거하여 모두 영모재 휘 재정을 조상으로 하는데 공의 제3자인 찰방공 휘 윤성은 효우와 문학으로 알려졌다. 그 후손들이 한미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중간에 동산 원곡으로 이사하여 사는 이가 열 두어 집인데, 문헌이 빠진 것이 많아서 선대의 일을 단장하지 못하여 한을 품은 지 오래였다.

 

지난해에 재극 재신 재균 재근 등 여러 사람이 종중에 의논을 내어, 사는 동네의 남향 언덕에 네 칸 집을 세우고 원모재라 편액을 달았다. 찰방공의 묘소가 남쪽 10리의 운정산 술좌 언덕에 있고, 공의 배위인 연일정씨의 묘소가 동편 10리의 독산에 간좌 언덕에 있어서, 여기서 세제의 재계하는 곳으로 하고, 또한 일족을 모으고 빈객을 맞이하는 두 가지 일을 겸하기 위함이었다. 금년 겨울에 그 일족의 수재인 표진이 내게 상인방에 걸 글을 청하였다. 나는 가만히 원모라고 편액을 단 것은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추모하는 마음은 그 소리와 모습이 접촉함으로 인하여 보고 느끼는 데서 생겨난다. 선조의 시대는 이미 수 백 년이 지나 바람결의 음성과 그림자 같은 모습이 아득하게 사라졌으니 무엇에 의지하여 멀리 추모하는 정성을 붙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들으니 공의 행적은 모조리 없어져 전하지 않으며, 단지 효도와 우애와 문학으로 알려졌을 뿐이라고 함에랴! 비록 그렇지만 선조는 후손의 뿌리이다. 뿌리가 없으면서 가지가 뻗어가는 것은 없다. 후손들이 매양 그 뿌리가 곧 나의 선조임을 생각한다면 저절로 하루라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대가 멀어져 사당을 헐어 조천 하더라도 다시 묘제의 예가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이치가 사람의 정으로 마지못할 일이다. 이미 이 예를 행한다면 또한 재계할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제사를 지내면서 재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이 오시어 상하좌우에 양양하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제 하씨 여러 사람이 한미한 일족으로 고달프게 애써 이 재실을 지었는데, 큰 성씨 큰 문벌의 사람이 손가락 한번 펴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어찌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이 참으로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 이로 말미암아 할 말이 있다. 대개 추모하는 데는 깊고 얕음이 있다. 만약 재계할 장소가 있어서 해마다 한 번 지내는 제사를 잘 치루는 것으로 추모하는 도리를 다하겠다고 여긴다면 모자란다.

 

선조께서 효도와 우애와 문학의 실질이 있었으니, 나 역시 그 효도와 우애와 문학을 본받아 국에서나 담장에서 사모하며, 키를 만들고 갓을 만들듯이 계승하여, 잠시라도 혹 늦추지 않아야 한다. 매양 일족을 모으거나 빈객을 맞이함에 한갓 술잔을 기우리며 한담만 하지 말고 때때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강론한 뒤에라야 참으로 깊이 사모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씨 여러분은 힘쓰시기 바란다.

을사(1965년) 섣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