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함청헌

 

 

함청헌

 

함청헌은 수곡 낙수암(落水巖)에 있다. 함와 이태(以泰) 공이 독서하던 재실이다. 낙수암에는 재실 낙수암(落水菴)과 함청헌, 그리고 시조 별사가 있다. 용운공이 지은 낙수암기에 이 세 건물을 세운 연혁을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각봉이 맨 처음 이름이었는데 역락재라 고쳤고 또 뒤에 역락을 고쳐 지금의 이름이 되었으며 옥류거사 이삼만이 편액을 써 문미(門楣)를 치장하였다. 우리 선왕고 함와공이 또 특별히 삼간집을 지어 계상에 우뚝이 안치하였으니 이 암자를 더욱 빛냄이요, 만년에 그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함청헌이라 이름 하니 또한 옥류거사의 필체이다. 그 북쪽에 고려 문하시랑공의 별사가 있는데 선군 묵와공이 처음 지었고 조카 선공감 재곤이 이어 수리하였으며 대종 후손 영규가 사사(祀事)를 주관해 오는데…….”

 

함청헌기(涵淸軒記)

 

함청헌(涵淸軒)은 역락재(亦樂齋) 동쪽 오보(五步) 쯤의 낙수암(落水巖)이라는 곳에 임해 있다. 개울물이 낙수하여 석담(石潭)이 되기에 그 깨끗함은 참으로 당연하다. 이는 헌(軒)의 동쪽에 있다. 또 섬돌 앞에 작은 못을 팠는데 장방형에 십 오평 정도이다. 낙수의 상류를 끌어와 섬돌을 선회하여 주입하였으니 그 깨끗함은 석담에 뒤지지 않는다. 이는 헌(軒)의 남쪽에 있다. 헌(軒)이 함청(涵淸)이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대개 여기에 있다. 역락재에는 찾아와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 노소(老少)가 뒤섞여 자리했는데 부로(父老)들이 이를 염려하여 달리 집 한 칸을 지을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금년 중춘(仲春) 아우 응현(膺賢)이 여러 사람과 도모하여 재목(材木)을 모으고 목수에게 명(命)하여 이를 완공하니 극히 아름답고 시원한 삼간(三間)집이 되었다. 이에 대인께서 함청(涵淸)이라 이름 짓고는 노군(盧君) 문(汶)에게 부탁하여 편액을 쓰고 불초(不肖)에게 명(命)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했다.

 

일찍이 들어보건대, 군자가 승지(勝地)에 단지 하나의 유상(遊賞)할 자리만을 갖춘다면 산수(山水)와 연하(煙霞)를 좋아하는 고질병에 불가하니 대저 어찌 외물(外物)을 인하여 자기를 반성하는 유익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흘러가는 것은 저와 같아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남아있고, ‘물을 볼 때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소용돌이를 봐야한다.’는 말이 맹자(孟子)에 나타나 있으니 성현(聖賢)은 물에서 무엇을 취했는가? 단지 여기에 거처함이 시원한 줄만 알고 자신을 반성(反省)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할 줄 모른다면 헌(軒)은 사람에게 있어 도리어 뜻을 잃게 하는 물건이 될 뿐이니 어찌 옳겠는가! 대저 성인(聖人)은 청명(淸明)함이 일신(一身)에 갖추어져 마치 강한(江漢)에서 세탁하고 추양(秋陽)에 말린 것 같음으로 외물(外物)의 깨끗함을 빌지 않아도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인(中人)이하는 외물로써 자기의 단점을 보완하지 않을 수 없기에 헌(軒)을 반드시 청류(淸流)곁에 짓고 편액을 함청(涵淸)이라 취한 까닭을 알겠다. 손을 씻고 얼굴을 닦아 때를 없애면 내 몸의 깨끗함이 곧 물의 깨끗함이요, 마음을 씻고 생각을 가다듬어 사악(邪惡)을 제거하면 내 마음의 회포 역시 헌(軒)의 포용과 같다. 일을 당하거나 외물(外物)을 접할 때 한 털끝의 인욕(人慾)이라도 천리(天理)에 누(累)를 끼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 또한 내게 있는 청명(淸明)이 아님이 없으니 대저 어찌 헌은 헌(軒)이요 사람은 사람이다 하여 서로 도우는 유익이 없겠는가! 산림의 아름다움은 송정 선생(松亭先生)의 기문(記文)에 모두 적혀 있음으로 다시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가 없다. 단지 함청(涵淸)의 뜻만을 취하여 기(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