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모덕재

 

 

모덕재

 

모덕재(慕德齋)는 사산처사(士山處士) 용와(容窩) 하진현(河晉賢) 공의 우모소(寓慕所)로서, 공의 증손(曾孫) 이진 씨, 현손 영두, 영원, 5대손 인근 씨 등이 제족과 더불어 정미(丁未, 1967년)에 세웠다.

 

 

모덕재기(慕德齋記)

 

서경(書經) 주서(周書) 군진편(君陳篇)에 “반드시 포용(包容)함이 있어야 덕(德)이 커진다.”라고 하였는데, 고(故) 사산처사(士山處士) 하공(河公)이 용와(容窩)라 자호(自號)함은 대개 그 뜻을 여기서 취한 것이고, 이제 그 후손들이 공을 위해 재사(齋舍)를 지어 모덕(慕德)이라 편액함도 또한 그 의미를 추술(追述)하여 부친 것이다.

 

대저, 사람이 덕을 지니는 것은 그릇에 물건을 담는 것과 같으니 그릇의 대소(大小)에 따라 그 물건을 담는 용량(容量)의 알맞음도 달라진다. 한 말 한 섬의 용량(容量)으로는 열 섬 백 섬을 감당하지 못하고 작은 잔에 술을 따를 적에는 조금만 지나쳐도 넘치는 것을 참으로 쉽게 볼 수 있다. 또, 생각건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일들은 크고 작고 옳고 그른 것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서 이를 대하여 처리할 적에는 반드시 그 알맞은 정도를 따라야 한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칭찬한다고 하여 경망스럽게 스스로 만족하거나 어떤 일 하나가 이루어졌다고 하여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여유를 부리다가 이에 반하여 내 심지(心志)를 거스르고 내 이목(耳目)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비록 그것이 작은 일 작은 물건이라도 이내 가슴속에 번민이 가득 차고 안색과 언사에 분노를 발끈 드러낸다면 이것은 어찌 덕이 조그마하여 능히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순(舜)임금이 미천(微賤)할 때는 수수밥에 채소를 먹으면서 종신(終身)토록 그러할 것처럼 하다가 천자(天子)가 된 후 화려한 옷에 풍악(風樂)을 즐기기를 본래부터 행했던 것처럼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칭송해도 더 기뻐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이 비난해도 조금도 동요(動搖)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과연 그 도량(度量)이 얼마나 큰지, 어찌 범인(凡人)이 논(論)할 바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처음 뜻을 세울 때나 평소 거처할 때 이런 자세로써 자신을 격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이보다는 아래이겠지만 재상(宰相)의 인장(印章)과 장수의 깃발을 하사(下賜)한다 해도 군왕(君王)의 은혜를 유쾌하게 여기지 않거나, 원수(怨讐)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리는 일들은 또한 특별한 포용(包容)으로서 마땅히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아, 그 능히 포용하는 여부(與否)를 보고 덕(德)의 대소(大小)를 이에 판단하니, 어찌 유념(留念)치 않을 것이며 어찌 힘쓰지 않을 것인가!

 

공(公)은 진양(晉陽)의 고가(古家)에서 생장하여 세상의 명망(名望)이 참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았는데도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굽혔다. 사우(師友)들과 종유(從遊)할 때는 겸허하게 수용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까 염려했고 집에 있거나 남을 대할 때에는 희로(喜怒)를 안색(顔色)에 드러내지 않았다. 서경(書經)의 그 한 마디 말을 깊이 음미(吟味)하고 또 실천함이 이와 같았으니, 오늘에 이르러 공(公)이 졸(卒)한 지 120년이 지났는데도 진양(晉陽)의 인사(人士)들이 칭송(稱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는 일찍이 그 유집(遺集)을 읽어보고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그 덕행(德行)을 크게 이룸을 보았으니 거듭 언급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자호(自號)한 뜻만 연유하여 이와 같이 설명하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를 미간(楣間)에 걸어두고 항상 살펴 공(公)의 대덕(大德)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한다.

 

이 재사(齋舍)를 시종(始終) 경영한 이는 공(公)의 증손 이진(伊鎭), 현손 영두(泳斗), 영원(泳源), 5대손 인근(仁根)이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한 이는 영두(泳斗) 씨의 아들 우근(宇根)이다.

세(歲) 정미(1967년) 정월 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