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세덕사

 

 

세덕사

 

세덕사(世德祠)는 진양하씨의 세덕(世德)을 기리는 곳으로 계원사, 지미사, 소승사 등의 사우(祠宇)와 염수당(念修堂), 경모재(景慕齋) 등의 재실로 구성되어 있다. 계원사에는 진양하씨 시조인 고려조(高麗朝) 증문하시랑평장사(贈門下侍郞平章事) 하공진(河拱辰) 공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계원사 동쪽에 위치한 지미사에는 8세 진강군 식(湜)·9세 병판공 거원(巨源)·10세 한림공 을숙(乙淑)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서쪽에 있는 소승사에는 11세 신호위공 렴(濂)·12세 직강공 순경(淳敬)의 위패를 봉안하여 모두 음력 10월 7일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사우(祠宇) 아래에 위치한 염수당에서는 13세 통찬공(通贊公) 기룡(起龍) 선조에서 17세 선조까지 가을 시제(時祭)를 올리며, 그 아래에 위치한 경모재는 종원들이 수시로 모여 돈목(敦睦)하면서 종사(宗事)를 의논하는 곳으로, 매년 음(陰) 4월 8일에 개최하는 종목회(宗睦會)와 진양하씨 종사연구회 모임 장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입구에는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기(碑記)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이 찬(撰)하였다.

세덕사 부지 500여 평은 2대 국회의원을 지낸 목산(牧山) 하만복(河萬濮) 후손이 희사하였고 사우와 재실은 청원 하경완(河京完) 후손의 출연금과 종원들의 성금으로 1971년 5월에 준공하였다.

 

세덕사 묘정비

 

계원사

계원사는 증문하시랑평장사(贈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된 시조 휘 하공진(河拱辰)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 10월 7일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지미사

지미사는 8세 진강군 휘 식(湜)과 9세 증 병조판서 휘 거원(巨源)과 10세 한림공 휘 을숙(乙淑) 세분의 위패를 모시고 음 10월 7일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소승사

소승사는 11세 신호위공 휘 렴(濂)과 12세 성균직강공 휘 순경(淳敬)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음 10월 7일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묘정비기(廟庭碑記)

 

진양 하공 휘 공진(拱辰)은 고려 현종 조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있으면서 충신으로 순절하였다. 후에 나라에서는 공(公)의 충절을 추존(追尊)하여 문하시랑평장사(贈門下侍郞平章事)의 높은 벼슬을 증직하였다.

 

현종 2년(辛亥, 1011)거란은 40만 대병으로 수도 개성(開城)을 침범(侵犯)하여 분탕을 하니 현종은 광주(廣州)로 피했다가 다시 남으로 나주(羅州)까지 쫓기게 되었다. 이때 하공(河公)은 현종의 친서(親署)를 받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거란군영으로 가서 천부(天賦)의 예지(叡智)와 호담(豪膽)으로 거란왕(契丹王)을 달래서 철군할 것을 청했다. 거란왕은 하공(河公)의 풍채와 언변(言辨)에 감동하여 철군할 것을 허락하고 하공(河公)을 인질로 하여 거란 땅에 머물게 하니 그로 인하여 현종은 무사하게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거란왕은 공(公)을 총애(寵愛)하여 대우했으나 공(公)은 고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간절했다. 가만히 천리마(千里馬)를 동국(東國)으로 가는 노변(路邊)에 배치해두었다. 그러나 일이 탄로되자, 거란왕은 크게 노(怒)하여 공(公)을 국문(鞠問)하였다. 공(公)은 안색(顔色)도 변하지 않고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다. 죽을지언정 너의 나라의 신하는 될 수 없다.”하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란왕은 의롭게 생각해서 다시 유서(諭書)를 내려 거란의 신하가 되라 하니 공(公)은 호통쳐 거란왕을 꾸짖었다. 슬프다, 드디어 공(公)은 해(害)를 당하니 현종 2년(辛亥, 1011) 12월이다. 문종 6년(壬辰, 1052년) 국가에서는 공(公)의 충절을 표창하여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의 벼슬을 추증하고 초상(肖像)을 기린각상(麒麟閣上)에 그려 걸었다. 이분이 고려 열전(列傳)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公)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계원사(啓源祠)다. 지미사(趾美祠)에는 제1위에 휘(諱) 식(湜)을 모시었으니 증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 행선관서승공(贈純忠補助功臣輔國崇祿大夫判�'c9蔽콜ㅮ쟌皆�燎솰芥�ね�의 신위(神位)요, 제2위에는 휘(諱) 거원(巨源)이시니 증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행중정대부 전객령공(贈純忠翊祚功臣自憲大夫兵曹判書行中正大夫典客令公)의 신위(神位)요, 제3위는 을숙(乙淑)이시니 한림학사 정용낭장 비순위공(翰林學士精勇郞將備巡衛公)의 신위(神位)다. 소승사(昭繩祠)의 제1위는 휘(諱) 렴(濂)이시니 정용산원 신호위공(精勇散員神虎衛公)의 신위(神位)요, 제2위는 휘(諱) 순경(淳敬)이시니 세종 26년 갑자(甲子, 1444) 문과에 등제하여 세조 조(世祖朝)에 좌익원종공신 행성균관 직강공(佐翼元從功臣行成均館直講公)의 신위(神位)다. 계원(啓源), 지미(趾美), 소승(昭繩) 삼사(三祠)의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면서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전(傳)하기 위하여 증문하시랑평장사공(贈門下侍郞平章事公) 후손 경완(京完)은 세덕사(世德祠)를 건립하고 삼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운다.

    

 

세덕사기(世德祠記)

 

선조가 앞에서 통서(統緖)를 드리우고, 자손이 뒤에서 통서를 이어가는 것은 마치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물에 있어서 근원과 같다. 뿌리가 깊지 않은데 가지가 무성한 경우는 있지 않고 근원이 멀지 않은데도 유파(流波)가 길게 흐르는 경우는 있지 않다. 그래서 옛날 주(周)나라 사람들이 그들 왕업의 기초를 기술하면서 반드시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덕(德)을 노래해 마지않았던 것은 대개 근원이 깊고 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해서였다. 집안과 나라도 그런 도리는 같다. 후세에 사람의 집안에 세덕(世德)을 기리기 위해서 사당(祠堂)이 있는데 그 뜻은 이에서 근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씨(河氏)는 진양(晉陽)의 대족(大族)인데 그중 단목리(丹牧里)에 세거한 자는 그중 또 큰 파라고 할 할 수 있는데 마을 가운데 새로 지은 날아갈 듯한 사당이 있으니, 하씨들의 사당으로 그 시조 이하 중세(中世)의 몇 분을 제향하는 곳이다. 시랑공(侍郞公) 휘 공진(拱辰)은 고려 때의 재상으로 거란(契丹)에 사신을 가서 항의(抗義)하다가 순국(殉國)하여 그 탁월한 충절(忠節)이 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고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畵像)이 그려졌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그 후로 세대마다 유명한 분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진강군(晉康君) 휘 식(湜),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휘 거원(巨源)은 모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한림공(翰林公) 휘 을숙(乙淑), 신호위공(神護衛公) 휘 염(濂), 성균직강공(成均直講公) 휘 순경(淳敬)은 비록 사적(史籍)이 사라져 자세한 것을 상고할 수 없지만 그들이 쌓은 덕망과 모책(謨策)이 전후를 이어 모두 한 집안을 빛내 함께 제향을 받는다.

 

하씨의 전후 선조 가운데 여기에서 제향 해야 할 덕망 있는 분들이 여기에 그치지 않겠지만 특별히 이 몇 분을 든 것은 이 사당을 설치한 것이 전적으로 단목(丹牧)에 사는 분들이 그 직계만 거론한 것이지 방조(傍祖)에게는 미치지 않아 그 형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진강군(晉康君) 이하 몇 세는 묘소를 징험할 수가 없어 시제(時祭)를 빠뜨리고 거행하지 못한 지 오래여서 자손들이 한스러워한 나머지 이곳에서 추모(追慕)하는 정성을 펴고자 하여 그 나머지 분들에게까지 두루 미치지 못한 것은 예절 상 어쩔 수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사당의 제도는 정위(正位)가 있고 동서 배향(配享)이 있는데 정위에는 시조를 모시면서 이름을 계원(啓源)이라 하였으니, 시조를 존중하고 수통(垂統)을 중히 하기 위해서요 동서에 다섯 분을 배향하고 동쪽은 지미(趾美)라 하고 서쪽은 소승(昭繩)이라 한 것은 통서를 이어 계술(繼述)했다는 뜻에서요 당은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어서 이름을 염수(念修)라 하였으니, 계술(繼述)하는 효성을 힘쓰라는 뜻에서이다.

 

사당은 건물이 높다랗고 화려하여 그 규모가 웅장해서 추원보본(追遠報本)하고 조상을 높인다는 뜻이 빠짐없이 아주 잘 나타났으니, 대개 주(周)나라 사람의 시(詩)의 뜻에 근본한 것이다. 처음 시작은 여러 족인들의 의논에서 나왔지만 후손(後孫) 경완(京完)이 특히 힘을 써서 낙성하고, 후손 순봉(恂鳳)이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일찍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내가 그 청을 응낙하기 전에 순봉 씨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 일가 만진(萬璡) 만진(萬振) 둘이 다시 와서 청하므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고, 또 생각하건대 지금은 강상(綱常)이 추락하는 세상이어서 조상을 존경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의리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런데도 하씨들이 이런 때 이런 역사를 하니, 이는 한 시대에 경종(警鐘)을 울리는 일이지 한 집안의 일만이라고 할 수 없다. 또 경완(京完) 군이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시해 앞장선 정성은 가위 세속을 벗어나 세교(世敎)에 모범이 되는데 어찌 기꺼이 기문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周)나라 사람들이 자기 선조의 덕을 노래한 것이 다만 밖으로 자랑하기 위한 것만 아니요 후손들을 경칙(警飭)하기 위한 것으로 그 요점은 “네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聿修厥德]”라는 한 마디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하씨들이 사당 이름을 세덕사라고 한 것이 길이 옛사람의 그런 뜻을 취한 것인데 참으로 이러한 실제가 없다면 어찌 세덕이란 이름이 귀하겠는가? 오직 이런 뜻을 잘 살펴 조상들의 덕을 닦아서 이 사당이 빛이 나게 하는 것은 지금 계시는 하씨들과 후세의 여러 군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하겠다. 이에 특별히 거론해서 분발하게 한다.

    

 

세덕사 상량문(世德祠上樑文)

 

다음과 같이 씁니다.

유명한 석덕(碩德)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졌고, 시경(詩經)에서 ‘세덕(世德)을 지어 구하셨도다.’라고 하셨네. 사당을 재향(梓鄕 고향)에 새로 지으니, 예(禮)의 근본을 잊지 않았네. 정성이 지극하면 사물이 이루어지는 때가 있도다. 삼가 생각하건대, 하씨(河氏)는 진양(晉陽)에서 나와 남쪽 지방의 명문(名門)이 되었네. 문하시랑공(門下侍郞公)부터 시작하여 역대(歷代) 천년이었네. 고려 때 조정에 벼슬하여 위망(位望)이 일세에 중하여 북쪽 오랑캐나라에 사신 가서 그들 조정에서 임금의 명(命) 욕보이지 않았네. 흉악한 저들 모의에 대항해 마침내 인(仁)을 이루셨으니, 성인(聖人)의 가르침 지키셨네.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면 어찌 큰 인물을 알아보랴? 난리 때에 성신(誠臣)을 알아보네. 사신(使臣)으로 가서 돌아가셨으니, 자취는 비록 북해(北海)의 소무(蘇武)와 다르지만 오랑캐에게 굽히지 않고 꾸짖었으니, 수양(睢陽)의 장순(張巡)에게 부끄럽지 않네. 높은 충성 중국과 오랑캐나라에 떨치고 나라의 공신각(功臣閣)에 초상 그려졌네. 그 위대한 공적 부녀자와 어린이도 노래하고, 고을에서는 공북당(拱北堂)이라 부르네. 이미 이런 공적 전했으니 마땅히 계속 이어가리. 보조공신(補祚功臣) 진강공(晉康公) 벼슬 받으니 만족하네. 병판공이 기미를 보고 은퇴한 만년의 절의(節義), 한림공(翰林公)이 청선(淸選)으로 문원(文苑)의 재목이 된 것을 볼 수 있고, 신호위공(神護衛公)이 은거하면서도 봉공(奉公) 진직(盡職)한 것, 직강공(直講公)이 성균관(成均館) 직임으로 척불소(斥佛疏)를 올려 유문(儒門)에 이바지한 공로 등은 가전(家傳)이 산일(散逸)되어 자세하지 않아 마침내 기송(杞宋)의 문헌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네. 남기신 법도 잃지 말고 전승(傳承)하면 자손들의 모범이 되리. 대개 이는 여러 세대가 남긴 모책(謨策)이니 제사를 받기에 마땅하네. 여러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해 아직까지 제향하는 정성을 바치지 못했네. 이 단동(丹洞) 세장(世庄)은 실로 오래 전부터 범씨(范氏)의 오읍(吳邑) 상재(桑梓)와 같으니, 이 모두가 선조들께서 남기신 음덕(蔭德)이네. 재실(齋室)과 사당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후일에 아래에서는 존숭(尊崇)하여 제사를 받들고, 위에서는 빠뜨린다면 신령들께서 어찌 편안하겠는가? 그 뒤를 말미암고 앞을 미루는 것 역시 예의 뜻에 다르지 않을 것이네. 이에 높고 시원하게 트인 한 구역을 넓혀서 몇 칸의 새 집을 지었네. 지금부터 온 종족이 한 마음으로 하고, 다 마치지 못한 일은 후에 어진 후손이 정성을 바쳐야 하리. 상하 좌우로 원류(原流)를 구분하고 좌우로 분배하였으며 사당방을 동서로 나눈 것은 의기(義起)에도 맞네. 어찌 정성을 바치지 않으면 흠향(歆饗)하겠는가? 조상을 추념하는 정성 양양하니, 오르내리는 영령들 화수회(花樹會)를 하시네. 공경히 절도 있게 소목(昭穆)에 제사를 올리니 추원(追遠)하는 정성으로 거의 풍속을 보겠네. 뒤를 이어 지켜가기가 어려우니, 어찌 세덕이란 편액(扁額) 생각하지 않으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상량노래 불러보세.

 

  동(東)

젊은이들아, 들보를 동쪽으로 밀치거라!

저 강물은 돌고 돌아 동쪽으로 흐르네

오랑캐 조정에서 절개 지켜 존주(尊周)한 의리

밝고 밝은 하늘의 해가 충성심 비추네

 

  서(西)

젊은이들아, 들보를 서쪽으로 밀치거라!

만길 높은 두류산 저 서쪽에 우뚝 솟았네

삐죽삐죽 솟아 늘어서 있는 산봉우리들

그 어느 것인들 조봉에서 나온 것 아니랴

  남(南)

젊은이들아, 들보를 남쪽으로 밀치거라!

지령이 분수령 남쪽에 인물을 많이 냈네.

봉황새 굴에 평범한 새 없는 줄 알겠으니

영웅호걸 몇 명이나 배출했나?

 

  북(北)

젊은이들아, 들보를 북쪽으로 밀치거라!

반짝반짝 빛나는 별자리들 북극성을 호위하네.

조상 존경하는 정성 원래 이와 같나니

하늘과 사람 한 이치여서 어긋남이 없다네.

 

  상(上)

젊은이들아, 들보를 위로 밀치거라!

그 누가 하늘 아래에 살지 않으랴

고금의 복을 받는 이치 다름이 없으니

덕을 좋아하는 백성들 어찌 잊을쏘냐?

 

  하(下)

젊은이들아, 들보를 아래로 밀치거라!

지금 세상 윤리가 모조리 땅에 떨어졌네.

선조를 잊고 근본을 등진 자 그 누구인가

이 소식 듣고 이마에 식은땀 흘릴 자 많으리.

 

삼가 원하옵건대, 상량한 후 기초가 튼튼하고 은택이 길이 흐르고, 제수가 깨끗하고 성의가 돈독해지게 하소서. 대대로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도리를 강구해 전통 있는 명문 집안의 명성을 떨어지지 말게 하시고,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모범 풍속을 영원히 전하여 조상들에게 욕을 끼치지 말고 빛을 내게 하소서.

    안동(安東) 권용현(權龍鉉)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