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경양재

 

 

경양재

 

매봉산 자락에 크고 웅장한 경양재(景陽齋)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우뚝 서있다. 이 재실은 우루목 입향조인 양암 하활(河活) 공과 세 아드님 맹보(孟寶) 중보(仲寶) 계보(季寶)를 경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재실이다. 해마다 5월 5일에 춘계 향례를 봉향하고 음력 10월 보름에는 시제를 올린다.

 

 

경양재기(景陽齋記)

 

함양읍 북쪽 오리쯤에 이름난 마을이 있으니 우동(愚洞)으로 곧 우리 하(河)씨의 세장(世庄)이다. 나의 13대조 공조참의 양암부군(陽菴府君)께서 진양의 단동(丹洞)으로부터 이곳에 터를 잡아 산지가 오백 년이 넘었다. 부군은 천자(天資)가 순후하고 품행이 독실하였으며 음애(陰崖) 이(李) 선생의 문인이다. 토계강당(兎溪講堂)에서 애옹(艾翁)을 배알하고 소학, 근사록, 상례(喪禮) 등 서책을 받았다.

 

이후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냇가 바위 위에 수간의 정사를 짓고 즐거이 노닐면서 자기 호를 휴절거사(休絶居士)라 하니 대개 세상 인간사를 피하여 두문(杜門) 한다는 뜻이다. 일찍이 송규암(宋圭菴) 선생을 사천 적소에서 뵈온 인연으로 이구암(李龜岩) 선생을 만나서 학문의 요결을 서로 강론하였더니 이옹이 경복하였다. 부군께서 천분이 심고하고 학문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어버이 섬김에 효를 다하고 형에게 그 공경을 다하고 향사에 정성을 다하고 의리에 엄하고 가사에 정정한 규모가 있었고 사람을 대하는 데 이르기까지 가득하였다.

 

아들이 4남이었으니 우계(愚溪) 선생 맹보(孟寶)는 효우와 학행으로 효자 정려를 받고 구천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중보(仲寶)는 참판으로 호는 죽재(竹齋)이고, 세보(世寶)는 임진란 때 행방불명되어 후사가 없고, 계보(季寶)는 참판이다. 세분 아드님의 자손이 번성하여 널리 퍼졌으니 덕업과 문장, 충효와 의열이 대대로 끊이지 않음을 세상이 아는 바요, 마을 앞에 엄숙히 늘어선 삼 효자 정문은 사람마다 우러러보며 지금 역시 사회에 이름을 날리는 자가 많으니 이 모두가 어찌 부군께서 덕을 심은 여복이 아니라 하겠는가? 지난 병인년 춘정에 여러 유지들이 잊지 않고 흠모하여 재실을 지어 제사코자 문중에 의론하니 여러 문중이 즐거워 하니라 드디어 성금을 내어 마을 가운데의 양지쪽에 터를 잡아 열심히 오가육영(五架六楹)의 기와집을 지었으니 그 규모의 화려하고 화려치 못 함을 논할 것이 아니고 또한 면면히 이어오는 효심이 아니면 어찌 이일이 이루어졌겠는가? 진실로 우리 문중의 경사로다. 매년 양력 오월 오일을 제일로 정하여 헌작하니 세일제의 예를 따름이요. 우계, 죽재 참판공을 배향한다.

 

이 재실에서 제사지내고 거처 하면서 부군의 은덕을 길이 사모하고 화수의 정의를 밝혀서 가슴깊이 새기고 체득하여 나날이 행한다면 거의 후손된 도리를 다한다 하겠으니 어떻게 불절을 걱정 하리오 제족은 더욱 힘쓸지어다. 문중이 그릇되게 나에게 기문을 지어라 부탁하거늘 오호라 이를 회고하건대 분말 같은 작은 후손 불초 주현(周鉉)이 생면하고 또한 글도 모르면서 그 어찌 부군의 덕행을 만의 하나인들 헤아려 본뜨리오. 굳게 사양하였으나 부득하여 머뭇거리다가 그 참담하고 외람됨을 잊어버리고 정성들여 족보와 선현(先賢)들의 서술한 문자 중에서 주워 모아 글을 이루어 문중의 명령에 보답하노라. 현판을 경양재라 걸었음은 부군을 그리워하는 거동이요 문명세광은 세세 유관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기문을 지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