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춘곡재

 

 

춘곡재

 

춘곡재는 이조판서 진평군 하위보(河魏寶)의 6남 참봉공 경(憬)의 제향(음10월 10일)을 올리는 재실이다. 재실은 후손 계인(啓仁) 공이 종원들의 중의를 모아 창건하였고 1953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후손 하원식(河元植)이 1998년 종원들의 헌성금을 모아 방과 마루를 보수하고 기와를 이고 담장을 쌓는 등 다시 중수하였다.

 

 

춘곡재기(春谷齋記)

 

춘곡재는 고 침랑 진양 하공 휘 경(憬)을 위하여 지었다. 하씨는 진양의 세족이니 그 성한 집안을 꼽아보면 동쪽은 단동이요 서쪽은 사곡이다. 공은 단동에서 태어나고 세상을 떠났으나 이제 사곡에 재실을 마련함은 후세 자손의 거처를 따른 것이다.

 

무릇 재사는 묘소 가까이 많이 세우는데 이는 체백이 묻힌 곳이라 정령이 인하여 강림하고 무덤이 있는 곳이라 모목을 수호할 수 있으며 세사 향사에는 이곳에서 재숙하고 제례를 마치고 물러나선 여기서 음복하기 때문이다. 공의 묘가 이미 여기에 있지 않으니 이 몇 가지 중 하나도 해당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에 재사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청컨대 시험 삼아 해명해 보리라.

 

대저 선조를 추모함은 그 위인을 추모하는 것이니 정령과 체백은 이에 속한 것이요, 선조를 섬김은 정성으로 섬기나니 제물을 바침은 이에 따른 것이다. 이미 그 위인을 추모하고 정성으로 섬긴다면 그 전형을 포장하고 사모하여 잊지 않음은 장차 어디로 간들 그 도를 이루지 못하겠는가! 듣건대 침랑공은 훌륭한 부친의 시례 가르침을 받았고 구형제가 매진하는 가운데 처하여 행실은 인륜에 돈독하고 학문은 연원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징험할만한 기록이 없으나 당대를 상론하면 그 사람됨을 볼 것이다.

상론에도 또한 그러하거늘 하물며 친히 그 자손 되어 추모할 바를 모르겠는가! 이미 추모 할 바를 알았다면 사랑과 정성은 스스로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리니 무릇 일상의 이목과 기거 출입하는 사이에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또한 어찌 반드시 마을이나 묘로써 따지겠는가! 하물며 정령의 모임은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고 자손의 정신은 곧 조고의 정신이니 후손의 거주지에 나아가 선조의 유업을 구하는 것은 그 사리가 더욱 명백하다.

 

이에 덧붙여 어른을 봉양하고 자제를 가르치며 귀객을 맞이하고 문물을 닦으면 유택을 함양하고 음덕을 밝히는 것이니 그 선조를 추모하고 선조를 섬기는 일로 무엇이 이보다 낫겠는가! 이에 이 재사의 건립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재사의 창건은 공의 후손 계인 씨가 중의를 모았고 조카 영식이 어려운 형편에도 정성과 힘을 다했으니 그 공이 가장 뚜렷하며, 여러 후손이 협력하여 완성하였다. 사곡이 유명하게 된 것은 본래 송정 선생이 훌륭한 업적을 남긴 마을이고 이제 가문을 대대로 지켜온 이들은 대개 공의 혈손이지만 입계하여 가깝게 되니 그 정의가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사가 완성되자 나의 벗 용환이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공의 후손으로 공의 백씨 송강공 후로 양자 간 후손인데, 비호함이 또한 지극하다. 계인 씨가 누차 나를 방문하여 용환군의 기록을 보이면서 일언으로 찬양하기를 청하니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갑오(甲午, 1954년) 건월(乾月) 하완(下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