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죽천재

 

 

죽천재

 

본 재실은 대곡면 단목리에 있으며 증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 하위보(河魏寶) 공의 10남 단주공 하변(河忭)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11일이다.

 

 

죽천재 중건기(竹泉齋重建記)

 

우리 고을 문물이 성함에 예나 지금이나 단목을 칭송한 것은 우리 하씨가 들어가 산 지 오백년이 되었고 큰 벼슬아치와 큰 선비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자손들도 번성하여 집들이 즐비하게 연하였는데 타성 하나 사는 이 없고 또 각 파의 재실이 많이 빛나게 하여 동네 모양이 성함이 다른 문중보다 우월하였다.

 

중저조(中著祖) 휘 위보(魏寶)는 생원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와 진평군의 군호를 받았고 십일 남을 두었는데 두 아들은 일찍 죽고 세 아들은 무후하였다. 여섯 아들은 모두 후손이 있어 이 마을에 같이 살고 모두 문장과 덕행과 벼슬로 이름이 드러났다. 단주 선생 휘 변(忭)은 선조 임진란에 열일곱의 나이로 일본에 납치되어 가 이십일 년을 억류당하였으나 그 본뜻을 굳게 지켜 돌아왔으니 그 곧고 굳센 절개는 가히 한나라 소무(蘇武)에 비유하여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 살고 있는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대대로 청빈하게 살고 있으나 집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선조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과 몸가짐을 돈독히 하는 것이 진실로 고가의 법도가 있었다.

 

일찍 선생과 그 아들 생원공을 위하여 재실을 마련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손 향원 씨가 고생으로 약간의 재물을 저축하여 중년에 사 칸 헌집을 사서 죽천재라 명한 것은 생각건대 ‘대의 푸르고 푸른 절개처럼 곧고 샘의 맑은 기상처럼 쉬지 않고 흐른다.’는 뜻으로 선생의 높은 절개와 맑은 기상에 비유하였다. 집 지은 지 오래되어 가히 오래 유지할 수 없으므로 양자 간 아들 계정(啓正) 씨가 아버님의 뜻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힘써 농사지어 절용하여 모은 지 수십 년에 뜻을 이루어 집터를 자기 집 근방 깨끗하고 좋은 죽림 아래에 정하고 모두 새 재목과 새 기와로 네 칸 집을 지었으니 그 규모의 치밀함과 제도의 화려함이 참으로 좋은 집이 되어 족히 백세라도 재계하고 잠자고 후손들의 글공부할 장소로 마땅하도다. 이에서 볼 때 다른 문중의 재실과 뒤떨어지지 않고 위로는 선부조의 한스러운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뒤를 열어주는 도를 다하였은즉 그 정성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어느 날 그 문중 동생 계천(啓千)을 보내어 동근(東根)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내 이미 그 상량문을 지었은즉 어찌 이 일을 사양할 수 있으랴? 가만히 생각건대 뜻이 있는 사람은 일을 마침내 이룬다 하더니 지금 계정(啓正) 씨에게서 보았도다. 구차하게 녹녹히 돈을 모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힘써 농사 지어 절용하여 날로 모으고 해로 모아 이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선조를 위하는 독실한 정성이 있지 아니하고 능히 그러하였으랴? 마땅히 이에 조석으로 거처하여 선조를 높이고 일가 화목하는 도리를 강구하고 재계하고 옷을 갈아입어 계시는 뜻한 정성을 이루었은즉 공적이 큰 조상의 영령이 매우 기뻐하고, 어찌 날마다 후손을 돕지 않겠는가! 대저 수호하는 일은 황주 죽루기문에 말하지 아니 하였던가 뒷사람이 나를 더불어 뜻을 같이하여 이어가며 수리한즉 이 누(樓)가 썩지 아니할 것이라 하였으니 계정(啓正) 씨 같은 치밀한 효성으로 어찌 이어갈 어진 후손이 계속하여 남아 있지 아니하랴! 그러한즉 이 재실의 수(壽)가 가히 다함이 없을 것을 기약할 것이다. 이것으로써 기문을 하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