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제월정

 

 

제월정

 

제월정은 대곡면 단목리 지내 마을 북쪽에 있다. 이곳에서 음력 10월 11일에 단지공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문간 옆에 단지(丹池) 하 선생 수비(竪碑) 헌성금을 기록한 작은 안내 표지석이 있고, 그 앞으로 경상대 허권수 교수가 지은 「단지 선생 사적비(丹池先生事蹟碑)」가 있다. 정자 안에는 하진탁(河鎭卓)의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10대손 계휘(啓輝)의 「원모재 상량문(遠慕齋上樑文)」 10대손 계효(啓涍)의 「원모재기(遠慕齋記)」, 1952년 김황(金榥)이 지은 「제월정기(霽月亭記)」가 있고, 「제월정(霽月亭)」 현판은 이동흠(李棟欽)이 대자(大字)로 썼다. 재실은 단목리 진양하씨 단지공파(丹池公派)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월정기(霽月亭記)

 

옛날 진양에 성균 진사 하공(河公) 휘 협(悏)이 있었으니, 천성이 독실하고 명가에서 태어나 학문과 덕행을 겸비하였다. 뒷사람들이 그가 살던 곳을 따서 단지(丹池) 선생이라 하였고, 오늘날까지 고을의 선비로 우대하여 반열에 올린다. 앞서 선생이 남긴 글과 실기(實記)를 전년(前年)에 세상에 간행하더니, 이제 그 후손이 또 그 분이 살던 마을에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재실에 편액을 달기를 ‘제월정’이라고 하니, 당시의 여러 현인들이 선생을 ‘맑은 시내 정자에 비 갠 달(霽月)이 떴구나!(瀟灑溪亭霽月臨)’라고 일컬은 말에서 따온 것이다. 달이 하늘에 뜨면 그 빛을 우러러보지 않는 이가 없는데, 그것이 비가 개인 뒤이니 신선하고 정결하고, 더욱이 생생한 빛이 한층 좋아서 옛 현인이 그것을 형용하기를 ‘도가 있는 기상은 오직 이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했으니, 선생이 이런 칭호에 해당한다면 그 기상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이보다 앞서 공이 돌아가시자 진주동쪽 동지산에 장례하고, 후손이 공을 위하여 재실을 단동 지내에 두고, 이름을 원모재(遠慕齋)로 하여 마련해 두더니, 세월 지난 지 이미 60년 쯤 근세에 이르러 다시 새로 분암(墳菴)을 동지(東旨)에 짓고 원모재의 현판을 옮기고 단지동 옛 재실은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제월정으로 편액하였다. 향토의 사림(士林)이 좇아서 계를 모아 회원을 모으고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을 신장시키니 공의 명성이 이에 더욱 높아졌고, 선인(先人)의 미풍(美風)을 잇는 후인이 있어서 또한 장차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 또한 선(善)하지 아니한가!

 

내 선대는 진주 사람이라서 공의 명성을 이어 들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알기에 사림이 경모하는 날에 참여하여 청(請)하기에 충고하나니, 공의 명성과 실적(實跡)의 소중함은 아득히 3백 년 전이지만 역대 현인들의 저술을 한 번 살펴보면 알 것이다. 진실로 도(道)를 구(求)한 것은 곧 인륜의 일상적인 상례를 넘지 아니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마땅하였다. 이제 공을 사모하여 배우기를 원한다면 또한 이를 생각하여 그 맡은 바에 힘을 다하여야 할 따름이다.

 

옛날 점필재 김 선생이 한훤당 김 선생께 「소학」 한 부를 주면서,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光風霽月)이 모두 이 가운데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우리 유가(儒家)의 가르침이 원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으니, 처음부터 높고 먼 허공을 바라보지 아니하고는 가히 친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제월정이란 편액에서 이것을 밝히니, 제공(諸公)의 착한 깨달음을 알지 못하고서야 다시 어떤 말을 하리오? 나를 찾아와 기문을 지으라고 한 사람은 공의 후손 정근이다.

임진년1952 음력 5월 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