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용강재

 

 

용강재

 

용강재는 진사 단지공 하협의 삼남 생원 달한(達漢) 공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96년 정초에 후손들이 공을 우모할 재사를 건립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진목위(眞木位) 설(渫)의 문중에서 부지 250평을 제공받고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세웠다. 재실의 명칭은 공의 자호를 따서 용강재라 하였다.

 

 

용강재기(龍岡齋記)

 

진주관아(晋州官衙)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가다보면 장중(莊重)한 고가(古家)가 그윽한 유서(由緖) 깊은 한 마을이 저 멀리 숲속으로 은은히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이름난 단목(丹牧) 마을이다. 진양하씨들의 세거지(世居地)인데, 효우시례(孝友詩禮)의 가문(家門)으로서 명공현사(名公賢士)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하씨(河氏)는 고려(高麗) 현종조(顯宗朝) 충절신(忠節臣)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을 시조(始祖)로 삼는다. 조선중기(朝鮮中期)에 이르러 증 이조판서 진평군 휘 위보(贈吏曹判書晋平君諱魏寶)는 11남을 두었는데, 모두가 유림(儒林)에서 명망(名望)이 있었다. 아들 가운데 휘 협(悏)은 호(號)가 단지(丹池)로서,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나 그 행적이 진양지(晋陽誌)에 실려 전한다. 그 셋째 아들 휘 달한(達漢)은 문한(文翰)이 전아(典雅)하고 거지(擧止)가 단중(端重)하여 사우(士友)들의 추중을 입었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서도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으니, 당시의 조정은 당쟁이 격렬(激烈)하여 자신의 경륜(經綸)을 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때 유림과 관계(官界)에 크게 영향력을 갖고 있던 분이 이끌어주려고 했지만, 공은 개결(介潔)한 성품으로 구차(苟且)한 행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물러나 향리에다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짓고서 경학(經學)에 잠심(潛心)하여 자락(自樂)하였다. 세속의 명리에 대한 생각을 끊고서 산수간(山水間)을 소요(逍遙)하니, 당시 사람들이 학(鶴)에 비유하였다. 공이 용강(龍岡)이라고 자호(自號)한 것은, 저으기 남양(南陽)땅 와룡강(臥龍岡) 아래에 은거하면서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하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흠모(欽慕)해서였다. 만약 공이 좋은 시대를 만나 그 온축(蘊蓄)한 바를 펼칠 수 있었다면 백성들에게 크게 혜택을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삼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공의 후손들은 번성하여 이미 수백 호가 넘었다. 그러나 용강정사(龍岡精舍)는 이미 자취가 없어져, 후손들이 한 데 모여 공의 유덕(遺德)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늘 아쉬워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병자(1996)년 정초에 후손들이 모여 우모(寓慕)할 재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이전에 공의 차자(次子) 진목위(眞木位) 휘 설(渫)을 위한 재사를 건립하기 위하여 진목위 종중(眞木位宗中)에서 마련해 두었던 250여 평의 터를, 공을 위한 재사를 짓는 데 쓰도록 제공하였다. 이에 계동(啓東)이 추진위원장에 추대되어, 이 일을 위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후손들의 정성을 결집(結集)하고 목재를 고르고 대목(大木)을 불러오는 등 이 일을 통관(統管)하였다. 당시 곤영회(昆永會) 회장 계식(癸植)은 이 일을 맨 먼저 발의하였고, 솔선하여 큰 성금을 헌정(獻呈)했다. 위원 찬식(璨植), 일원(一源), 무식(武植) 등은 각각 최선을 다해서 이 일을 도왔다. 특히 계동(啓東)과 무식(武植)은 늘 현장에 나와서 일을 감독하고 쇄사(瑣事)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모든 후손들이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오래 걸리지 않아 산뜻한 네 칸(四間)의 건물이 완성되었고, 문랑(門廊), 주사(廚舍), 축대(築臺)와 담장도 말끔하게 다 갖추어졌다. 재사(齋舍)의 명칭은 공의 호를 따서 썼고, 규모는 지나치게 사치스럽지도 졸박(拙樸)하지도 않았다.

 

재사(齋舍)는 옛날 공이 생장(生長)했던 단목 마을 중앙에 자리 잡았다. 뒤로는 멀리 두류산(頭流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월아산(月牙山)이 마주하고 있고, 재사(齋舍) 앞에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들판 끝으로는 남강(南江)이 감돌아 흐른다. 그윽한 동부(洞府)와 잘 조화를 이루고 사방 산수(山水)의 푸르른 기운이 재사(齋舍)로 배어드는 듯하다.

 

공의 후손된 사람들은 이 재사가 완성되었다 하여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이제부터 이 용강재에 자주 모여 조상을 숭모하고 족의(族誼)를 돈독히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촌수가 멀어졌지만, 본래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문운(門運)이 창성(昌盛)해져 무궁토록 뻗어나 갈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자주 모여 세계(世系)를 밝히지 않고 족의(族誼)를 돈독히 하지 않는다면, 자손 상호간의 관계는 마치 모르는 길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 어찌 문운(門運)이 창성(昌盛)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후손들은 이 재사에서 예법을 익히고 역사를 논하고 독서를 하고 정신을 식히는 일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빈객(賓客)을 대접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도 여기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재사의 건립을 하찮은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재사를 잘 활용하여 한 집안이 아주 화목하게 지내고 집안의 젊은이들이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익혀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큰 수확이다. 이런 일이 확대되어 나가면 오늘날의 혼란한 세상 풍속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이 재사를 건립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다른 가문의 부러움을 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후손들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집안의 젊은이들이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할 것이다.

 

재사를 짓는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계동(啓東)과 무식(武植)이 나를 방문하여 기문(記文)을 부탁할 새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공의 사행(事行)과 재사건립(齋舍建立)의 전말(顚末)을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적는 바이다.

기묘(1999)년 정월 초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