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사양재

 

 

사양재

 

사양재는 주손(冑孫)인 사계(沙溪) 영규(泳奎)와 생원 여이헌(與人軒) 재화(載華) 등이 주도하여 처음 수곡면 대천리 사방동 판윤공 묘소 아래 5기둥 4칸의 재사를 짓고 그곳의 지명에 따라 사방재(士芳齋)라 편액을 달았다. 그 뒤로 종친들이 해마다 이곳에서 제례를 행함을 상례(常禮)로 삼았으나, 수호하기 어려워지자 1952 임진년에 남주(南洲) 공이 종친들의 뜻을 모아 이곳 사곡으로 이건하여 지명에 따라 편액을 고쳐서 사양재(士陽齋)라 하였다.

 

사양재는 음력 10월 8일 이후 첫 일요일에 고려시대 선조 그리고 판윤공 유(游)와 그 후손들의 제향(祭享)을 받드는 재실이다.

 

 

사양재기(士陽齋記)

 

우리 선조 한성판윤공 휘 유(游)로부터 송정 선생 휘 수일에 이르기까지 8대의 묘소가 진주 서쪽 수곡산에 있다. 후손들이 해마다 세제를 드림이 매우 근면하지만 치제할 장소가 없어 한스러워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 선군자가 진사공 휘 재화로 더불어 또한 일찍이 개탄하더니 제족과 의논하여 판윤공 묘하에 네 칸 재사를 짓고 지명을 따라 사방이라 편액하였다. 이후로 종족이 해마다 한 번씩 이곳에 모여 제사를 거행하였으나 수호의 미비함으로 얼마 못되어 점점 황폐하였다. 내 또한 그 지탱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여 다시 제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임진년 봄에 자손들이 사는 사곡촌으로 이건하여 사양재라 개칭하였으니 역시 지명을 따른 것이다. 이로부터 지난날 종족이 해마다 한 번 모이던 것이 지금은 조석으로 모이게 되었으니 황폐할 염려가 없고 수호하는 도리 또한 갖추어졌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날 우리 5대조 예암공 휘 우현이 어렸을 적에, 숙부 함와공 휘 이태께서 무릎에 앉혀 놓고 문종계를 창설하여 문계로써 8대(八代)를 받드니 8대의 제수가 비로소 정해졌으며 또한 방계로 환성·내복·수긍 세 선생에게까지 미쳤다. 우리 고조 죽헌공 휘 봉운에 이르러선 대대로 지켜온 고려 답 2두를 종계에 헌납하였으니 재정이 더욱 넉넉하여 모자랄 염려가 없었다. 제수가 이미 정해지고 계금이 넉넉하여 모자랄 염려가 없게 되었는데 이루지 못한 것은 유독 이 재사뿐이었다.

 

그러나 백년 사이에 또 우리 선군자와 생원공 세대에 이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우리 문중의 다행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전(傳)에 말하기를, 효자는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사업을 잘 받든다고 하였다. 대개 선인이 뜻하던 바를 마땅히 뜻으로 삼아 계승하고 선인이 일삼던 바를 일삼아 받든다면 그 수호는 단지 이 재사에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 재사의 수호 또한 이 방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종족이 마땅히 함께 힘쓸 일이다.

 

내가 낙성 하던 날에 나머지 고려전 한 구를 문계의 문서에 병합하여 이 재사에 귀속시켰다. 이에 기록하여 기문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