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경인사

 

 

경인사

 

경인사는 운문에 거주하는 운수당 후손들이 시조공과 운수당(雲水堂) 윤(潤) 공의 위패를 모시고 세일제(歲一祭)를 거행하기 위하여 1981년에 세운 사당이다. 처음엔 소원사(溯源祠)라 이름하고 매년 동지(冬至)에 제를 올렸으며, 매월 삭망과 절일(節日)에 분향 의식을 행하였다.

 

1987년 유림에서 봉사(奉祀)하기로 하면서 경인사로 편액을 고쳤으며, 율수재를 운강서원(雲岡書院)이라고 바꾸었다. 성균관전의 동근(東根) 찬(撰) 운강서원기(雲岡書院記)에 “향성(鄕省)의 사림들이 언제나 서로 모여서 말하기를 ‘두 분 선생과 같은 충절과 학덕으로는 사림에서 향례(享禮)함이 마땅할 것인데 후손에게만 맡겨서 해마다 한 번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 사림의 유감스런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지난 정묘년 겨울에도 또 공론이 크게 일어 통문을 만들어 사림의 각 가정에 보내었다. 이리하여 익년(翌年) 무진 2월 21일에 도회(道會)를 운문의 율수재에서 크게 개최하니 제제다사(濟濟多士)가 여러 고을에서 모두 모여 충분히 토의하니 이의 없이 귀일(歸一)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유사를 정하고 위패를 고쳐 써서 봉안고유(奉安告由)의 의전(儀典)을 위하여 다음날 아침에 처음으로 사림의 향례(享禮)를 행했으니 우리 선조의 정충 고절(貞忠孤節)을 백세(百世) 후에 위로한 것이다. 그러나 사재(祠齋)의 편액을 고치지 않을 수 없어서 여러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시랑 선생(侍郞先生)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셨고 운수당 선생은 혼조(昏朝)를 당하여 병이(秉彛)가 돈독하여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모시었다. 또 마을 이름이 운문이니 사(祠)를 경인(景仁)이라 하고 원(院)을 운강서원(雲岡書院)이라 이르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는가?’”라고 그 전말(顚末)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안 되어 유림의 식자(識者)들이 별세하면서 유림 봉사가 끊어지고 문중에서 제사를 받들다가 안타깝게도 세도(世道)가 바뀌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율수(聿修)란 조상의 덕업을 계승하여 발양(發揚)한다는 뜻이니, 곧 선조 제향 때 재명(齋明)하는 집이요, 후진 양성을 위한 재실인 곳이다. 당정(堂庭)에는 1986년 12월에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 찬(撰) 비문으로 세운 진양하씨 소원사 묘정비가 있다.

 

 

진양하씨 소원사 묘정비문(晉陽河氏溯源祠廟庭碑文)

 

대저, 충성과 절개는 사람에게 있어서 크나큰 도리이다. 나라가 이로써 존립하고 인간 사회 기강이 이로써 유지된다. 충(忠)과 절(節)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없고,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실로 충절(忠節)을 세운 사람은 비록 백세후에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칭송하고 추모하여 충절을 고취시켜야 한다. 하물며 그 자손이 선조를 추모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것이 진양하씨가 사우(祠宇)를 지어 시조 시랑 공을 받드는 까닭이다.

 

살피건대, 공은 휘가 공진(拱辰)이니 고려 현종 때 사람이다. 그때 거란 왕이 대군을 일으켜 침입하니, 임금이 남쪽 나주(羅州)로 피난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였다. 공은 그때 좌사낭중(左司郞中)으로서 임금이 있는 곳에 급히 달려가 강화를 청하여 적병을 물러가게 할 계책을 상주하고, 자신이 가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장하게 여기고 허락하였다. 공이 이에 고영기(高英起)와 왕의 서신을 가지고 거란 진영으로 갔다. 그때 거란의 선봉이 창화현에 이르렀는데, 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들어갔다. 거란 왕을 만나 의로써 충고하여 말이 매우 간곡하고 지극하니, 거란 왕이 그 풍채가 영준·위걸하고 논의가 격절(激切)함을 보고 감동하여 기특하게 여겨, 국왕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방금 강남 만 리 밖으로 떠났으니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거란 왕이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강화를 허락하고 철군하였다. 이로써 임금이 수도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거란이 철수해 갈 때 공을 인질로 억류하여 신하로 삼고자 지극히 환대하니, 공이 밖으로는 말씨를 공손히 하였으나 속으로는 돌아올 결심을 하고 준마를 많이 구입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쭉 배치하여 기회를 틈타 탈출하려 하였다. 거란 왕이 고하는 자가 있어 알고 친국(親鞫)하여 꾸짖으니,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의 신하인데 어찌 이국(異國)의 신하가 되겠느냐? 내 뜻은 결정되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거란 왕이 의롭게 여겨 용서하고 절개를 바꾸어 충성하도록 여러 번 타일렀다. 공은 언사를 더욱 높게 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으니, 실로 현종 2년 신해(辛亥) 12월 기유(己酉)삭이었다. 훗날 문종 6년 병진(1052년)에 나라에서 그 충절을 포상하여 특별히 상서공부시랑평장사(尙書工部侍郞平章事)를 증직하고 초상화를 그려 기린각(麒麟閣 : 功臣閣)에 걸었다. 이런 일들이 고려사 본기와 열전 및 동국여지승람에 함께 실려 있다.

 

오호라, 나라가 위태로운 날에 약한 형세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적진에 나아가 세 치 혀를 휘둘러 40만 대군을 물리치고 국란(國亂)을 그치게 했으니, 그 지략과 공로가 참으로 지극히 크다. 인질이 되어 뜻이 간절하고 고국을 그리워하여 시종 힘써 힘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순사(殉死)하니, 그 곧은 충성심과 높은 절개는 마땅히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이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것과, 신라 박제상(朴堤上)이 왜에 굴복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전후로 궤(軌)를 같이하니, 어찌 훌륭하지 않는가!

 

공은 본래 진주 사람이므로 진주 성중에 옛날에 공진당(拱辰堂)이라는 집이 있었는데, 공의 이름으로써 그 유적(遺蹟)지를 표시한 것이다. 그것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 근세에 이르러 여러 후손들이 그 땅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우고 제사를 드리니, 대개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함이다. 또, 각각 그 후손이 거주하는 곳에 따라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받드니, 부쳐 추모하기 때문이다. 운문의 소원사도 그중 하나이다. 내 일찍이 그 족인들의 청으로 그 사우(祠宇) 기문을 지었는데, 이제 또 뜰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념함에, 해조(海照), 만식(萬植), 종식(淙植)이 종의(宗意)를 모아 다시 나에게 글을 요청했다. 내 노쇠하여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서 그 자취를 살피고 서술한다. 이어서 명(銘)하여 가로되,

 

용감하도다, 시랑공이여! 그 생애 특별히 뛰어나다.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 자신을 잊고 나라를 걱정했네. 정의로 설득하여 적군을 물리치니, 지략과 충담(忠膽)으로 공을 세워 나라가 존립하였네. 인질 되어 적의 조정에서, 끝까지 분발하여 칼 앞에도 굽히지 않으니, 빛나는 그 충절 해와 달과 겨루도다. 그 충과 절(節)이 역사에 빛나도다. 나라가 힘입어 빛나고 정의가 힘입어 분명해지니, 남기신 기풍 영원히 드리워 백세토록 본받으리. 묘정(廟廷)에 우뚝 솟아 보본(報本) 제사 변함없으리.

 

1986년 음(陰) 11월

    

 

소원사 율수재기(溯源祠聿修齋記)

 

하씨(河氏)는 관향(貫鄕)과 세거(世居)를 진양(晉陽)으로 하여 진주(晉州)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가문이 번성하여 고을에서 그 이름이 드러난 집안은 손가락을 꼽아 셀 수 있을 정도인데 운문(雲門) 문중이 그 중 하나다.

 

하씨(河氏)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시랑(侍郞) 휘(諱) 공진(拱辰)이니, 거란 침략 때 누차 사신으로 왕래하여 화친하고 나라를 지키기에 정성을 다해 위험을 피하지 않으니 나라가 힘입었고, 필경 거란에 억류되어 뜻을 굽히지 않고 항거하여 끝내 순절(殉節)하니, 그 지극한 충성과 훌륭한 지조는 족히 한 시대에 떨쳐 빛났고, 후세까지 그 빛나는 이름을 드리웠다.

 

모든 하씨(河氏)가 일찍이 진주성(晉州城) 안 옛터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향(祭享)을 받들고 이름을 경충사(景忠祠)라 한 것은 공(公)의 충절을 높이 숭배하기 때문이요, 또 각각 세거에서 따로 제사를 받들어 숭배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는 것은 각기 시조(始祖)께 보답하는 정성을 펼치기 위함이니, 사곡의 경절사(擎節祠)와 단목의 계원사(啓源祠)가 그것이다.

 

이에 운문의 하(河)씨들도 서로 의논하여 동일한 시조의 후손인데, 숭배하고 사모하여 제사를 받드는 예절이 어느 곳에서는 행해지고 어느 곳에서는 빠진다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는가, 우리도 계획하여 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제사지낼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이름을 소원사(溯源祠)라 하였으며, 그 아래에 재실을 짓고 이름을 율수재(聿修齋)라 하니, 규모가 자못 크고 제도(制度)가 완전히 갖추어졌다. 해마다 동지(冬至)에 제향(祭享)을 드리려 하니, 이것은 정 씨(程氏)가 동지(冬至)에 시조(始祖) 제향(祭享)을 받든 예(禮)를 따른 것이다.

 

역사(役事)가 끝나고 만식(萬植), 현수(炫洙) 두 사람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나이가 많아 사양할 만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하씨(河氏)와 일찍이 글로 교유(交遊)한 정의(情誼)가 있으며, 또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날에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큰일을 거행하는 것은 족히 퇴폐한 풍속(風俗)을 경계(警戒)하고 세상에 가르침을 보조(補助)할 수 있다고 느끼고 탄복하여 끝내 사양할 수 없었고, 또 소원(溯源)·율수(聿修)의 의미를 펼쳐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무릇, 시조는 물의 연원(淵源)과 같으니, 연원이 깊으면 멀리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은(殷)나라 조상인 설(契)과 주(周)나라 조상인 직(稷)이 모두 순(舜)임금을 도와 잘 다스려서 그 공덕이 백성들에게 깊이 미쳤기 때문에, 그 은택의 영향(影響)이 멀리 천여 년(千餘年)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마침내 은(殷)과 주(周)의 융성을 열어주었으니, 어찌 은택이 먼 후세까지 미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현조생민(玄鳥生民)의 시(詩)가 그 근원(根源)을 회고(回顧)하여 지어진 연유이다.

 

이제, 시랑공(侍郞公)께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끝내 순사(殉死)한 그 깨끗한 절개와 위대한 자취는 직(稷)과 설(契)에 비교하여도 거의 부끄럽지 않다. 고(故)로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에 자손이 번성하여 그 후손들이 창성하였으니, 그 은택이 멀리까지 미친 것이 은(殷)과 주(周)와 비교하여 집과 나라의 크고 작음은 같지 않으나 대비(對比)해도 방불하지 않은가? 그러한즉 후인들이 근원을 밝혀 추모(追慕)함은 그 역시 현조생민시(玄鳥生民詩)가 전하는 뜻이다. 그렇기는 해도 시인(詩人)이 선조의 덕을 노래하여 칭송한 것은 한갓 외부에 과시(誇示)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체로 후손들에게 경계하고 타일러서 선인(先人)의 사적(事蹟)을 이어가고 바꾸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시경(詩經) 대아(大雅)에서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 덕을 계승하여 높이 발휘하라’고 말한 것은 깊은 뜻이 있다.

 

진실로, 조상의 덕업(德業)을 계승·발휘하는 덕이 없으면 근본을 밝혀 말하는 것도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우(祠宇)와 이 재실의 이름이 반드시 서로 필수적이며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역시 율수(聿修)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하씨(河氏)가 마땅히 대대로 돌아보고 생각하여 그 숭모(崇慕)의 실사(實事)를 추구(追求)하는 바이고, 내가 그 뜻을 펴서 힘쓰도록 권장하는 까닭이다.

신유(1981년) 중추(仲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