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운수당

 

 

운수당

 

운수당(雲水堂)은, 운수당 휘 윤(潤) 선생께서 연산군 1년(1495년) 연산군의 부덕(不德)을 보고 귀향하시어 지은 집으로서, 고종 19년(1882년)에 중건하여 서쪽 방에는 영모재라고 편액을 달고 입암(立巖) 남정우(南廷瑀) 찬 당기(堂記)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찬(撰) 재기(齋記)를 걸었다. 1919년 준호(峻鎬), 해룡(海龍) 선조(先祖)께서 중수(重修)하시고 1943년에 다시 손 본 것을 2006년 7월 20일 종회장 태기(泰基), 운당(雲堂) 현식(炫植), 소석(小石) 찬식(찬植) 제씨(諸氏)께서 힘쓰시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01호로 지정받아 시 보조금으로 중수하였다. 운수당 앞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선생께서 축조하신 것이라고 한다. 옛날 선생께서는 이 연못까지의 길가 주변에 화훼를 재배하고 대나무를 심어 주자(朱子)의 천운활수(天雲活水)의 취지를 함양하며 유유자적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호(堂號)를 운수(雲水)라 하셨고, 후인들이 이를 선생의 호(號)로 삼았다.

 

 

운수당기(雲水堂記)

 

대저, 사람이 은둔하여 산림 속에 있으면서 운수(雲水)의 정취를 애호하면서 권세의 화려함을 잊는 것과, 출사하여 현달을 누리면서 권세의 부리는 바가 되어 운수(雲水)의 정취를 모르는 것, 이 양자(兩者)는 진실로 겸할 수 없다. 진양의 운문리 행우산 아래 운수당(雲水堂)이 있으니 고(故) 운수(雲水) 선생 하공께서 사시던 곳이다. 공은 현달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지만, 운수(雲水)를 그 집의 편액으로 한 것은, 소위 겸할 수 없는 것을 공은 겸하여 가졌기 때문이다.

 

공은 성종 때 사람이다. 일찍 경학(經學)과 문예로 이름이 드러났고, 거의 서른에 이르러 사마에 합격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겸 사국(史局)에 보임되셨다. 얼마 안 되어 육조(六曹)의 낭관(郎官)으로 옮겨 전도(前途)가 열렸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여 덕치(德治)에 어두움이 날로 심해지니, 환로(宦路)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운수동 깊은 곳에 이 집을 짓고, 책과 꽃, 대나무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즐기셨으니, 이 어찌 현달하였으면서 운수(雲水)의 정취를 안 것이 아니겠는가! 뒤에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정(鄭) 문익공이 추천한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선임(選任)에 응한 것이다. 그러나 곧게 버텨 굽히지 않고 거역하니 당시 대신들에게 미움을 사 용납될 수 없음을 알고 외직인 순천(順川) 군수로 나가 마침내 사옥(史獄)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대체로 운수(雲水)의 취지를 지녀서 권세의 부림이 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조짐을 미리 보고 현명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기꺼이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기꺼이 물러나며, 청요직(淸要職)을 버리고 미미한 외직을 맡겠는가? 후세 사람들이 운수당 선생을 존숭(尊崇)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은 마땅하다.

 

이제 운수당이 지어진 지 4백여 년이 지났는데 옛터가 그대로 황폐하게 전해졌으므로, 다시 수 칸 집을 우뚝 세우니 새롭게 환히 빛난다. 이 당(堂)에 오르는 자는 문 위의 편액을 우러러보고 공이 운수(雲水)를 즐기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경모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공의 후예가 되는 자들임에랴! 내 듣건대, 운문의 여러분들이 굳건히 스스로 지켜서 옛 성현의 글을 읽고 옳은 도리를 강마(講磨)하는 사람이 대체로 많다고 하니,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서로 운수(雲水)를 전해가는 취지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하니, 이 집이 어찌 다만 백 세까지만 전해지겠는가? 준호(峻鎬), 해룡(海龍) 두 선비가 예전 기문이 없어서 광식(光植)에게 명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사람이 보잘것없고 말이 능숙하지 못하다고 사양하다가,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망령되고 외람되지만 이와 같이 써서 이른다.

    

 

영모재기(永慕齋記)

 

재실은 운수당(雲水堂) 하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기 때문에 편액을 영모(永慕)라 하였다. 선생께서 일찍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공부하셨으며, 또 4척의 육신을 의탁하셨으므로, 현명하신 영령이 반드시 이곳에 내려오실 것이기에 이곳을 영모하는 장소로 이름 짓게 되었다.

 

선생은 뛰어난 재주로 생각을 바꾸어 유가(儒家)의 학문을 익혀, 당시 인망(人望)을 크게 얻고 남쪽 선비들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빛나던 성종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문과에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고 겸하여 사국(史局)을 맡아 처음으로 높고 현달(顯達)한 지위에 자취를 남기게 되었으니 장차 크게 쓰일 것 같았다. 그러나 때마침 어지러운 조정을 만나 언관(言官)으로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니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당시의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수명이 짧아 지닌 재주를 크게 베풀지 못했으니 시론(時論)이 애석하다 하였다. 후에 공론(公論)을 거쳐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올려 배향하였으니, 대체로 천운활수(天雲活水)의 뜻을 마음에 깨달아 지녀서, 후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혜택을 입힌 것은 속일 수 없다. 정(鄭) 문익공(文翼公)이 묘비에 명(銘)하기를, 쌓은 것은 많은데 발휘한 것은 적다고 한 것이 실상(實相)이며, 백세 뒤라도 역시 베푼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후인들이 멀어도 더욱 사모함이며, 이것이 영모(永慕)로써 편액을 다는 까닭이다.

 

오호라, 다른 가문의 자손은 현조(顯祖)를 높이 숭모하는 것을 모르는 자가 많은데, 모두 이처럼 진실로 숭모할 줄 안다면 천하의 일이 오늘날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씨가 현조를 영모하여 십세 전심(十世傳心)으로 성현의 글을 읽고 옳은 도리를 말해 왔고, 해통(海通)이 옛 문물과 제도로써 힘껏 행하여 매진하니, 족히 영모의 지극한 뜻을 증명하는 셈이요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내가 모르는 것을 가리는 것이니, 하씨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고 현조(顯祖)를 본받은 자손이 되었고, 삼가 살펴보면 영모의 실상(實相)도 역시 알게 되었다. 이미 해통(海通)에게 말한 것이 있어서 그 말에 이어 영모재 기문을 쓰게 되었다.

계축년(1913년) 4월 1일

    

 

운수당 중수기(雲水堂重修記)

 

이곳 운수당(雲水堂)은 운수당공 휘 윤(潤)께서 조선 연산군 1년 을묘 1495年에 연산군과 조정 대신들의 무도(無道)한 정치 행태를 보고 관직을 버리시고 환향(還鄕)하여 은거하실 때 영조(營造)하신 집이다. 당호를 운수(雲水)라고 하신 것은 주자(朱子)의 천운 활수(天雲活水)에서 인용한 것으로 하늘의 기운으로 지상의 생령(生靈)을 살리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다. 선생 기세(棄世) 후 이곳이 황폐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고종 19年 임오 1882年에 중건(重建)하고 서쪽 방 한 칸을 영모재(永慕齋)라 이름 하여 선생의 향사(享祀)에 재명(齊明)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1913年 계축 3月 15日 족선조(族先祖) 준호(峻鎬), 해룡(海龍) 제씨(諸氏)의 노고로 일차 중수(一次重修)하고, 입암(立巖) 남정우(南廷瑀) 찬 당기(堂記)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찬 재기(齋記)를 걸었다. 그 후 오랜 세월 속에 풍상우로를 겪으면서 후손(朽損)되기도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보수(補修)를 못하다가 다행히 西紀 2006年 7月 20日 종회장 태기(泰基)와 족조(族祖) 현식(炫植), 찬식(穳植)께서 힘쓰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第401號로 지정되어 도(道)와 진주시의 보조금 약 2억 4천만 원으로 3년여간(三年餘間)에 망추정(望楸亭)과 대문간, 담장까지 모두 보수하였다. 작업 때에는 종회장과 총무 병식(炳植)의 노고가 컸다.

 

집을 보수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당(堂)에 오르면 이 집을 세운 취지와 이 집을 보존하기 위하여 애쓴 선조들의 뜻을 반추(反芻)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선조를 숭모하는 도리요, 선조를 숭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선조를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호(嗚呼)라, 우리 선조들께서는 명망(名望)이 저세(著世)하고 위선 사업(爲先事業)이 혁혁(赫赫)하였으나, 금일 우리들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다행히 이 집이나마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는 조상의 음덕(蔭德)이요 후손들의 경행(慶幸)이다.

 

중수(重修)한 지 오래되어 종회장이 불녕(不佞)에게 기문(記文)을 요구하였으나 재주가 없어 사양하다가 그 전말(顚末)을 전해야 하겠기에 초(草)를 잡아 종인들의 동의로 이와 같이 밝혀 삼가 기(記)로 삼는다.

선생 돌아가신 지 511년 되는 해 신묘(2011년) 9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