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망추정

 

 

망추정

 

망추정은 임란 때 창의(倡義)로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망추정(望楸亭) 천서(天瑞) 공과, 공의 아들로 역시 임란에 선전관 훈련부정으로 공훈이 혁혁하여 원종공신 1등에 입록(入錄)되고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贈職)된 읍추헌(泣楸軒) 경호(慶灝) 공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금곡면 검암리 운문에 있다. 예전엔 우봉(우봉)에 있었으나 근래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했다.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목조 팔작지붕의 기와집이고, 왼쪽으로 마루가 두 칸, 오른쪽에 방이 한 칸으로 추모재(追慕齋)라는 편액을 또 달았다. 건물 안에는 1940년 안동인(安東人)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가 지은 ‘추모재기(追慕齋記)’가 있다. 그리고 처마 밑에는 강동호(姜東瑚)가 쓴 ‘망추정(望楸亭)’이라는 해서체의 대자(大字) 편액이 걸려있다.

 

 

망추정기(望楸亭記)

 

하씨(河氏)가 사는 진주 남쪽 운문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옛것을 숭상하는 이가 많고, 세상에 초연하였다. 준호(峻鎬), 해룡(海龍) 두 사람은 나와 가장 친했는데, 하루는 인곡산(仁谷山) 거처로 와서 청하기를, “우리 선조 승지공께서 일찍이 선고 별제공과 선비 파산이씨를 우봉곡(牛峰谷)에 장례하고 인하여 망추정을 지었고, 공의 아들 참판공 또한 공과 선비(先妣) 전의이씨를 여기에 장례하고 읍추헌(泣楸軒)을 만들었다. 그 후 300년이 지나 망추정과 읍추헌이 황폐해져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인년(1938년) 겨울 여러 일족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는 충효가 있는데, 추모할 집하나 없으니 후손으로서 수치스럽다.”라고 하고, 드디어 참판공 묘 아래에 땅을 골라 기묘년(1939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하였다. 재실이 모두 삼 칸인데, 당(堂)이 두 칸, 방이 한 칸인데 추모재(追慕齋)로 편액을 붙이며 한 해 한 번씩 재명(齋明)하는 장소로 겸하고자 하였다. 제족(諸族)이 모두 “선생의 글로써 현판을 걸기를 원하니 사양하지 마십시오.”하고 두 선조의 사적(事蹟) 문서를 보여주었다. 살펴보니, 승지공은 휘가 천서(天瑞)이시고, 참판공은 휘가 경호(慶灝)이셨다.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승지공은 전생서 참봉으로서 분연(奮然)히 동지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고, 진주로 달려와서 관군(官軍)을 기다렸다.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공(金公)이 듣고 격려하며 그의 방책과 전략을 들었다. 공이 무리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혹은 위력을 떨쳐 세(勢)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적의 소굴을 무찌르기도 하며 매번 나아가 이기고 돌아오니 학봉(鶴峰)은 반드시 그 공로를 공에게 돌렸다.

 

참판공 역시 선전관 훈련부정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의 진지(陣地)에 가서 왕명을 받아 전력을 다하여 수차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임금이 의주로 몽진할 때는 왕명으로 선봉이 되어 좌충우돌하며 피난길을 편안하게 하였고, 통군정(統軍亭)에 이르러서는 별초관(別抄官)으로 왕명을 받고 분전하여 적을 죽이니, 사방 50리에는 적들이 감히 아군 진영을 엿보지 못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우리나라의 위기가 극에 달했으나 끝내 요기(妖氣)를 깨끗이 소탕하고 다시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서너 명의 장수와 재상의 공이라고 하지만, 만약 충의지사가 미미한 관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곳곳에서 봉기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공의 부자와 같이 행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렇게 이룰 수 있었으랴? 충의로 나라를 보장하는 것이 성지(城池)와 창칼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위대하구나!

다만 생각건대, 충의에는 본말이 있으니, 효제(孝悌)하지 않고서도 충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 대체로 충의와 효제의 일은 달라 보이지만 도리는 같은 것이다. 이제 공의 부자를 보니 망추정과 읍추헌을 선영(先塋) 아래에 두고 함께 망추(望楸)와 읍추(泣楸)로 편액을 한 것으로 보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공이 집에 있을 때 효제(孝悌)의 실상이 있었으니, 공의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여 효제의 도리를 더욱 독실하게 한다면, 비록 이 변화가 심한 세상이라도 그 몸을 지키고 그 가문을 보전할 수 있어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이 재실이 오래갈 것이고, 재명(齋明)할 때도 예(禮)를 극진히 하여야 재실 편액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골짜기 안에 여러 대(代) 선조들의 묘가 많으나 일일이 들어 말할 수가 없다.

경진(1940년) 3월 하한(下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