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금호재

 

 

금호재

 

금산에서 문산 가는 길로 금호(琴湖) 못을 둘러 못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용심마을인데, 동네 가운데 높이 솟은 재실이 나온다. 금호재(金湖齋)이다. 이 재실은 운수당공 후손 중 통덕랑 금호공(金湖公) 휘 명정(命禎) 후손들이 통덕랑공 이하 3대를 우모(寓慕)하고 재숙(齋宿)하는 곳으로 삼기 위해 종장(宗丈) 도주(道柱)의 지도 아래 종손 만규 이하 전 종원이 갹출(醵出)하여 세운 집이다. 재실 중앙에는 성균관전의 창녕 성환덕(成煥德)이 지은 기문(記文)이 있다.

 

 

금호재기(金湖齋記)

 

진주의 하씨는 그 선대가 고려 현종 때 증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 휘 공진(拱辰)인데, 이후 명망 있는 사람들과 벼슬 높은 사람들이 배출되어 나라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후손 운수당(雲水堂) 휘 윤(潤)은 일찍 생원과 진사에 입격(入格)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과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고, 학덕이 사림의 태두(泰斗)가 되어 정강서원 아홉 현사(賢士)의 반열에 올라 배향되셨다.

 

10세손 통덕랑 금호공(金湖公) 휘 명정(命禎)께서 아들 통덕랑 휘 일(溢), 손자 휘 석천(錫千)과 함께 운문 세장지에서 대여촌 용심으로 이거(移居)하였으니, 대체로 이곳이 문행(文行)이 뛰어난 선비가 많고 석인(碩人)들께서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어질고 조심성이 있으며, 언행이 예의바르고 근면·검소하여 대가(大家)의 풍도와 가범(家範)과 신의(信義)을 잃지 않았다. 아름다운 지초(芝草)와 맛좋은 샘물은 근원이 있음을 알아 항상 중조(中祖) 세 분을 위해 재실 하나를 짓고자 하여 계속 힘썼으나 겨를을 갖지 못하여 항상 어진 보살핌 아래에 울고 싶었다.

 

지나간 갑술년에 일족이 한 곳에 모여 말하기를, 우리 하씨가 이곳에 거주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 재실 한 채 없으니 그것이 옳은가? 하니, 모두가 기꺼이 응답하여 즉석에서 약간의 자금을 갹출(醵出)하였다. 거주지 용심(龍潯) 양달에 상의하여 터를 잡고 약간의 금전으로 땅을 조금 사서 정지(整地)하고 초석(礎石)을 놓았고, 목공과 재목을 구하여 을해년 봄에 일을 시작하여 정축년 가을에 마쳤으니 삼년이 걸렸다. 재실은 사칸 집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어 제사를 받들고 좌우에 방을 마련하였으니 검소하면서도 넉넉하여 알맞다. 문루(門樓) 세 칸을 이어 지었으니 우모(寓慕)하고 재숙(齋宿)하는 곳으로 충분하다.

 

후손 만규, 도주, 병규, 영원, 병준 군이 그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니 감당할 수 없어 사양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말하기를, “여러분들 선조를 염려하지 말고 선조의 덕을 발양(發揚)하라. 하씨 여러분들이 선조의 의행(懿行)과 청덕(淸德)을 잊지 않고 여러분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선조의 뜻을 잇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하였다. 이것을 기(記)로 삼을 따름이다.

1997년 정축 동지절

    성균관전의 창산(昌山) 성환덕(成煥德)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