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경성재

 

 

경성재

 

경성재는 환성재 하락(河洛) 선생의 제향을 올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1971년에 주손 재문(載文)이 부지를 제공하고 종원들의 헌성금으로 창건하였다.

 

 

경성재기(景醒齋記)

 

진양 대각에 있는 경성재는 환성재 하 선생을 경모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대저 일언으로 선악의 분별을 밝히고 일신으로 성쇠의 운수에 유관한 이는 그 삶이 세도의 경중이 되고 그 유풍이 유속을 진작시키기 때문에 후인의 경모함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으니 공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예전 조선조 선조 때에 당의(黨議)가 일어나 조정이 분열되었는데 그 처음에는 한두 선비의 사사로움으로 말미암아 갈라졌지만 마침내 돌고 돌아 격렬해져 서로를 비난하고 선류를 모함하여 각각 붕당을 만들었다. 이에 문득 소인의 악행이 드러나고 흉악한 무리가 날뛰어 군자의 도가 소멸하니 그 재앙이 지극하였다.

 

공은 일찍이 유일(遺逸)로 왕자사부가 되었고, 성우계(成牛溪) 이율곡(李栗谷) 두 선생과 도의교를 맺고 청의(淸議)를 주장하였으니 선량한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두 선생이 뭇 사람의 모함을 받아 화를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수천마디의 소를 올려 통렬히 논박하고 성청(聖聽)의 깨침을 바랐다. 이로써 반대의 사람들이 떼 지어 일어나 공격하니 일신이 화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지만 회피하지 않았다. 옛날 성인이 역을 지으면서 양을 북돋우고 음을 억제함에 힘쓴 것은 선악의 분별이 이에 있다고 여겨 공허한 문자에 부친 것이니 어찌 세도를 깊이 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비록 낮은 지위에 머물러 당세에 행한 일이 없지만 그 소(疏)를 힘입어 청의(淸議)가 부지(扶持)되고 간사한 자가 자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그 학문의 바름과 식견의 고매함은 성인의 양을 북돋우고 음을 억제한 뜻을 깊이 체득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세도에 끼친 공로를 어찌 공허한 문자라 하여 낮게 보겠는가! 공은 일찍이 진양에서 상주로 잠시 옮겨가 살다가 임진란을 당하여 의를 세워 적에게 항거하다 마침내 부자가 순사하여 일문이 충효로써 조정의 포상을 입었다. 그 수립한 업적은 또한 참으로 지조를 실행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돌아보건대 후사가 세 번이나 끊어져 자손이 몰락하고 화재를 여러 번 겪어 유적이 소멸했으며 표창의 특전을 조정에서 받지 못하고 제사의 의식을 고을에서 행하지 못한 지 수백 년이니 아름다운 명성이 점점 사라졌다. 진실로 그 자취가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운수는 알 수 없지만 상론하는 이들이 개탄한지 오래 되었기에 재사의 건립이 비록 늦었지만 또한 그만 둘 수 없다. 이 역사는 비록 자손들의 정성에 의한 것이지만 경모하는 마음은 많은 선비가 한결같으니 이로 인하여 그 풍운을 더욱 구하면 장차 훗날 존숭하는 자리에서 무궁토록 감응할 것이다.

 

주손 재문(載文)이 그 족인 차운(溠運)과 함께 찾아와 나의 글을 청했다. 내 일찍이 공의 일에 느낀 점이 있고 또 말세의 사견이 범람하여 공의가 사라짐을 탄식하기 때문에 그 업적을 논하여 이 재사에 오르는 이에게 보인다.

을묘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