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대각서원

 

 

대각서원

 

각재(覺齋)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각봉 기슭에 문인과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향사를 드리기 위해 일신재 옛터에 대각서원을 짓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것이 1610년의 일이다. 이때 서원 상량문과 사우 봉안서는 송정 하수일(河受一)이 짓고 봉안문은 사호(思湖) 오장(吳長)이 지었다. 이 외에 하윤(河潤), 정대순(鄭大淳), 조경윤(曺慶潤), 손탄(孫坦), 유이영(柳伊榮) 등의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서원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뒤 131년이 지난 영조 13년 1737에 여섯 선생을 추봉하기 위하여 서원을 중건하였다. 이때 봉안된 육현(六賢)은 무송 손천우(撫松孫天佑), 백암 김대명(白巖金大鳴), 영무성재 하응도(寧無成齋河應圖), 모촌 이정(茅村李瀞), 조계 유종지(朝溪柳宗智), 송정 하수일(松亭河受一) 선생이다. 대각서원에 봉안된 7현 선생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면서 문장과 덕업으로 지역사회에 선비정신을 일깨웠던 분들이다.

1813년 후학들이 임진란으로 소실된 7현의 문적을 정리하여 대각서원 일기를 편찬하였고, 그 뒤 1826년에 다시 서원을 중창하였으나 1871년에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광복 후에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서원을 다시 일으켜 2004년 봄에 경상남도 문화재 제344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중수기(重修記)

 

서원(書院)을 지은 때는 만력 경술년(萬歷庚戌年, 1610년)으로 우리 각재 선생(覺齋先生)을 향사(享祀)하기 위해서이다. 백 년이 지난 정사년(丁巳年)에 여섯 선생을 뒤이어 봉안하니 방이 협소하고 위패(位牌) 자리가 비좁아 그 규모를 조금 넓혔다. 그 후 백여 년(百餘年)이 지난 지금 들보는 좀먹어 기울어지고 기둥은 썩어 부러졌다. 이에 부로(父老)들이 개탄하며 가군(家君)에게 촉탁하여 대책을 세우게 하니 드디어 약간의 재물을 내어 해마다 이자(利子)를 모았다. 하루는 가군(家君)이 한숨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비가 충분히 마련되기를 기다리다간 존엄(尊嚴)한 자리를 수호하는 도리에 결함이 생길 뿐만 아니라 수명(壽命)이란 기약이 없어 심력(心力)을 같이 하던 군자들도 왕왕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함을 기다리다 혹 후회를 남기기보다는 지금 이를 도모하여 내 직접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부로(父老)들이 성대한 의용(儀容)을 보게 하여 그들의 추모하는 정성에 보답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에 병술년 중추(中秋) 위패를 강당의 동재(東齋)로 옮기고 계추(季秋)에 비로소 착수하여 중동(仲冬) 22일 초석(礎石)을 세우고 4일 후 계묘일(癸卯日)에 상량(上樑)하였다. 다음해 계춘(季春) 공사를 마치니 위로는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 신문(神門), 주주(酒廚), 새문(塞門), 전청(典廳)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새로워졌다. 대개 들보와 기둥과 서까래는 옛 것을 버림이 십에 팔구(八九)로 그 공사를 돌아보건대 새로 짓는 것 못지않았다. 이에 참으로 이른바 꿩이 날 듯한 처마와 새가 솟을 듯한 마룻대, 죽전(竹田) 같은 터전에 송림(松林) 같은 풍채, 시원한 정원에 정연한 담장이다. 정녕 임사(任使)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리 완공이 신속하고 그 아름다움을 모두 갖출 수 있었겠는가! 유장(柳丈) 점(坫)과 아우 응현(膺賢)이 그 업무를 담당하고 성모(成某) 이모(李某) 조모(曺某)가 그 역사(役事)를 맡았으며 하모(河某)가 그 비용을 조달하였으니 드디어 맹하(孟夏) 중정일(仲丁日)에 봉안례(奉安禮)를 행하고 잔치를 열어 낙성(落成)하였다.

 

아! 우리 각재 선생은 조예(造詣)가 순정(純正)하여 이미 상등지위(上等地位)에 올랐다. 남명자(南冥子)는 설중한매(雪中寒梅)라 칭찬하였고 수우 옹(守愚翁)은 사상백로(沙上白鷺)라 찬탄하였으니 지금 미루어 상상컨대 그 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무송 선생(撫松先生)의 인사(人事)를 배워 천명(天命)을 달통(達通)함과, 백암 선생(白巖先生)의 문장과 행실, 영무성 선생(寧無成先生)의 고매 순수함과, 모촌 선생(茅村先生)의 의기 떨쳐 난(亂)을 바로잡음과, 조계 선생(朝溪先生)의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여김과, 송정 선생(松亭先生)의 정심(精深)한 학문에 이르러는 마땅히 백세토록 향사하며 후학의 존모(尊慕)가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 스스로 그만두지 못함을 오늘의 역사(役事)로 보건대 더욱 징험 할 수 있다.

 

오늘 이후로 무릇 우리 동지들은 그 시를 읊고 글을 읽으면서 사숙(私淑)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도리로 삼고 또 원우(院宇)를 수리하는 일은 반드시 금일 수군자(數君子)로써 기약한다면 어찌 선인(先人)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시문(記文)을 지을 소임은 나같이 글 못하는 이가 감당할 일이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이 역사(役事)의 전말(顚末)을 상세히 아는 이는 나만 같은 이가 없기에 갖추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