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장환(河章煥)  1874년(高宗 11) ~ 1928년

 

자는 경연(絅然)이요 호는 일암(逸庵)이니 송강(松岡) 항(恒)의 11세손이요 단연(丹淵)극호(極浩)의 6대손이고 행단(杏壇) 필원(泌源)의 손자이며 계중(啓重)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타협하지 않는 곧은 지조와 절개를 지녔고 유학(儒學)에 정진하여 이 지역 유림의 학맥(學脈)을 이어갔다. 성품이 강직한 공은 일제치하에서 일본에게는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며 세금을 징수하러온 일본 관원을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낸 일화(逸話)로 유명하다.

 

1919년 2월 고종 장례식(高宗葬禮式) 때는 일제가 금하는 백립(白笠)을 쓸 만큼 공은 선비의 절개(節槪)를 지켰다. 동포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흉년에는 집안 곳간을 열어 헐벗은 사람들을 구휼(救恤)하는 인자함을 보였다. 1919년 3월 1일 일제치하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을 때 각계 대표 33인 중에 유림대표가 빠져 있음을 애통해 하며 조국이 어려움에 빠져있는 상황에 학문에만 전념할 수는 없다고 하고 유림들과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했다.

 

1925년 3월 김창숙(金昌淑) 손후익(孫厚翼) 김황(金榥) 등 유림대표들이 해외에 독립기지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을 때 공은 자기 재산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을 뿐 아니라 김창숙 손영우 김화식 등과 함께 1925년 9월 비밀결사조직인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결성하여 진주, 함양 등 서부경남지방 모금을 총괄하였다. 이를 통해 거둔 자금은 무기 구입 등 독립활동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1926년 3월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왜경에 발각되어 손후익 김황 김화식 등과 함께 피검(被檢)되었는데, 유림 6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하의 유림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병인 유림단사건(丙寅儒林團事件) 또는 제2차 유림단의거(第二次儒林團義擧)라 한다. 대구 감옥에 구검(拘檢) 된 후 9개월 동안 미결수로서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결정(豫審終決決定)으로 방면(放免)된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1928년 1월 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

대한민국정부는 공의 항일 독립운동공훈을 인정하여 2002년 8월 15일 제57주년 광복절에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하였다.

 

배위는 광주노씨(光州盧氏)로 진사 응우(應祐)의 따님이며, 3남(男)을 두니 만기(萬基), 만리(萬里), 만춘(萬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