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始祖公) 존영(尊影)   

진양하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조의 충절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 공이다. 공의 순절(殉節)로 인하여 진주(晉州)가 충절의 고장으로 칭송되었다.

 

공은 진주 출신으로 고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에 임명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993년) 후 거란과의 교역이 빈번해지고, 압록 강변에서 쫓겨난 여진족의 준동을 감시할 목적으로 압록강 나루를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처음 이승건(李承乾)을 보냈다가 곧 공으로 교대한 것이다. 이후 공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하고 왕의 신임을 받아, 목종(穆宗) 12년(1009년)에는 임금이 병이 들자 친종장군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유종(柳宗)과 함께 근전문(近殿門)을 지켰다. 이때, 목종의 모후인 헌애왕후(세칭 천추태후)가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는데, 이 낌새를 안 목종은 이성(異姓)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경(평양)에 있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를 급히 불러 입위(入衛)케 하였다. 강조(康兆)가 영추문(迎秋門)에 이르자 공과 탁사정 등이 강조에게 협력하여 김치양 일당을 제거하게 되었고, 마침내 강조는 목종마저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詢)을 왕위에 세우니 이가 곧 고려 8대 현종(顯宗)이다.

 

현종은 유년시절에도 온갖 간난(艱難)을 겪었지만 즉위하자마자 위기에 봉착했다. 즉, 강조(康兆)의 죄를 물어 거란 왕 성종(聖宗)이 현종 1년(1010년) 11월에 40만 대군으로 침공한 것이다. 앞서 공이 동서양계(東西兩界)에 근무할 때 임의로 여진(女眞)부락으로 진군했다가 패한 적이 있는데, 이를 분하게 여긴 유종(柳宗)이 귀순 차 화주관(和州館)에 온 여진인 95명을 모두 죽인 일이 있었다. 이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여진족이 강조(康兆)가 목종을 살해한 사실을 거란 왕에게 고변(告變)하여 부추기니, 거란이 그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여 강조(康兆)를 거란으로 입조(入朝)토록 하였다. 고려 조정이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있던 공과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있던 유종(柳宗)을 원도(遠島)로 유배 보내면서 강조의 입조(入朝)를 미루니, 고려의 친송 정책(親宋政策)에 불만이던 거란 왕이 강조(康兆)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공한 것이다.

-고려는 거란 1차 침입 때 서희가 강동6주를 되찾으면서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거란의 인정을 받은 왕을 신하가 마음대로 폐위시켰다고 구실을 삼은 것이다.-

 

현종은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통주(평북 선천)에서 막도록 했지만, 강조(康兆)는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되었다. 이에 현종은 12월에 공과 유종을 귀양지에서 불러들이고 남쪽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임금이 창화현(昌化縣 : 揚州)에 이르렀을 때 그곳 향리(鄕吏)가 난동을 부려 임금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거의 도망쳐 버렸고, 측근 몇 사람과 지채문(智蔡文) 장군뿐이었다. 이 향리(鄕吏)가 난동을 부리면서 거짓으로 공(公)인 척하여 임금이 공을 오해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원도(遠島)에서 풀려난 공이 유종(柳宗)과 함께 20여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12월 갑술일에 창화현에 도착하여 향리의 난동을 진압하고 임금을 배알하니 임금은 공과 유종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당시 대륙의 정세는 송(宋)과 요(遼)가 패권(覇權)을 다투고 있었는데 요(遼)는 후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가 고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하게 되었다. 이를 감지(感知)한 공은 전란 수습책으로 “거란은 본디 강조(康兆)를 토벌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는데 이제 이미 강조가 죽었으니 거란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청하여 철군토록 하겠습니다.”하고 자청하였다. 임금이 점을 쳐 길괘(吉卦)를 얻었으므로 공과 고영기(高英起)로 하여금 표장(表狀)을 받들고 거란 군영으로 가게하고, 화의의 진척여부도 모른 채 일로(一路) 나주(羅州)를 향해 몽진을 재촉하였다.

 

한편 공은 거란의 동정을 살피고자 먼저 낭장(郞將) 장민(張旻)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을 거란 군영에 보내어, 거짓으로 ‘국왕이 친히 배알하고자 하나 대국의 병위(兵威)를 두려워하여 강남으로 피하고, 배신(陪臣) 하공진(河拱辰) 등을 보내 청화(請和)하려 하였으나 하공진(河拱辰) 등도 또한 두려워서 감히 오지 못하고 저희들이 이 사유를 고하러 왔습니다.’라고 전하려 하였으나, 거란의 선봉(先鋒)이 이미 창화현에 와서 포진(布陣)해 있었다. 이에 공이 국서를 받들고 거란의 군영에 당당히 나아가 화의를 청했다. 거란 군은 공에게 물었다. “너의 국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니, 강남으로 몽진하시어 지금 어디 계시는지 소재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강남은 얼마나 먼고?”하니, “강남은 멀어서 몇 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등 임기응변(臨機應辯)으로 설득력 있게 답변하니, 추격하던 거란 군이 그제야 돌아섰다. 그 후 거란 군의 본영이 개경에 도달하여 대묘(大廟)와 궁궐은 물론 민가까지 불태웠다. 이에 1월 3일 공과 고영기는 더 큰 참화를 막기 위해 다시 거란 본영으로 가서 거란왕 성종을 만나 회군을 청하니 거란 왕이 이를 허락하고는 공과 고영기를 볼모로 하고 1월 11일 철수하게 되었다. 거란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내침(來侵)한 지 두 달여, 공이 철군 교섭에 착수한 지 십여 일만에 거둔 성과이다.

 

나주(羅州)에 파천(播遷)해 있던 국왕은 통사(통역관) 사인(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 정열(丁悅)이 가져온 공의 주장(奏狀)을 보고 거란 군이 이미 퇴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기뻐하더니, 국왕 일행은 곧 나주를 떠나 공주와 청주를 거쳐 그 다음 달인 2월 23일에 개경에 돌아왔다.

 

한편, 거란 성종(聖宗)은 인질로 데리고 간 공과 고영기를 예우(禮遇)하고 관대(款待)하였다. 그러나 두 분은 은밀히 짜고 겉으로는 충성을 보여 환심을 사고 속으로는 환국(還國)의 방도만을 생각하여, 거짓으로 고려가 이미 망했으니 군병을 이끌고 가서 살피고 오겠다고 하니 거란 성종은 그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곧 고려국왕이 환도(還都)한 사실이 탄로나 공은 연경(燕京:북경)에, 고영기는 중경(中京 : 심양)에 분리 안치되었다.

 

공과 고영기(高英起)에 대한 거란 성종(聖宗)의 회유공작(懷柔工作)은 그치지 않았다. 두 분에게 양가(良家)의 처녀를 아내로 삼게 하고 3일 만에 소연(小宴)을 열고, 5일 만에 대연(大宴)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환국(還國)을 꾀하여 준마(駿馬)를 많이 사서 귀국길에 배치하여 탈출을 도모하다가 발각 되어 거란왕의 친국(親鞫)을 받게 되었다. 공은 사실대로 말하고 ‘나는 고려의 신하로서 감히 두마음이 있을 수 없다.(我是高麗人不敢有二心)’라고 하며 언사(言辭)를 거칠고 불손하게 하여 거란 왕을 크게 격분시키니, 마침내 심간(心肝)을 씹히는 장렬한 죽음을 당하였다.  현종 2년 신해(辛亥) 12월의 일이었다.

 

공은 탁월한 지혜로 거란 군을 철수시켜 임금과 백성을 구하였고, 적국에서는 회유를 거부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로 고려인의 기백을 보여주었다. 공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상징이 되어 후일 국난기(國難期)에 민족정신을 고취(鼓吹)시키는 본보기가 되었으며, 진주를 충절(忠節)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현종은 공의 죽음을 전해 듣고 공의 공적을 기리어 아들 칙충(則忠)에게 녹(祿)과 자급(資級)을 더했다. 현종의 아들인 문종(文宗)도 6년(1052년)에 교서를 내려 “좌사낭중 하공진은 경술년 거란군의 침입 시에 적과 마주하여 신변의 위협을 생각지 않고 삼촌설(三寸舌)로써 대병을 물리쳤으니,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정(影幀)을 기린각(麒麟閣)에 봉안하고 공의 아들 칙충(則忠)에게 5품직을 제수하라”하였다. 8월에는 공에게 위사(衛社)의 공이 있다 하여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를 추증(追贈)하고 또 공의 아들 칙충(則忠)을 불러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증직(贈職)하였다.

 

 

고려 증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 공 충절사적기

(高麗贈門下侍郞同平章事河拱辰公忠節事蹟記)

 

진양하공 휘 공진(拱辰)은 고려 현종 때에 삼촌(三寸)의 설(舌)로써 40만 거란군을 물리치고 적정(敵廷)에서 거란주(契丹主)의 환대를 비웃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고려 충절의 표상이다.

하공(河公)은 진주인으로서 고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에 제수되어 역사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목종 때는 중랑장으로서 친종장군 유방과 중랑장 탁사정(卓思政)과 더불어 침질한 왕을 잘 호위하더니, 동왕(同王) 12년 정월에 마침 천추태후가 척신 김치양(金致陽)과 더불어 왕을 폐하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즉위시키려는 대역(大逆)을 도모함에 목종은 종사의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공(公)을 포함한 친위세력으로 하여금 좌우를 수호하게 하는 한편 태조의 손자 대랑원군 순(詢)을 삼각산 신혈사에서 데려와 후사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로 하여금 궁내를 호위하도록 조처하였다.

 

이에 강조(康兆)가 상경하였으나 오히려 딴 마음을 품고 목종(穆宗)을 폐하고 대랑원군으로 왕위를 계승케 하는 한편 김치양(金致陽)을 처형하고 폐왕(廢王)마저 살해하는 변란을 일으켰더니 급기야 거란주 성종이 강조(康兆)의 문제를 구실로 40만 대군을 친솔하여 내침하는 외환이 닥치게 되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거란군을 강조(康兆)가 대적하였으나 곧 패하였고, 며칠 뒤 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으로 몽진을 떠났다. 이에 하공(河公)은 도차(道次)에 왕을 배알하고 주(奏)하기를 “거란 내침이 본래 강조(康兆)의 불충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이제 강조가 체포되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서 화를 청하면 반드시 회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복서(卜筮)에서 길괘을 얻었으므로 곧 하공(河公)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의를 청하기로 하였다. 하공(河公)은 창화현에 나아가서 우선 낭장 장민과 별장 정열로 하여금 청화서를 보내어 국왕이 친림코자 하신 바이나 병위를 두려워하여 오지 못하고 공진(拱辰) 등에게 그 사유를 담은 서한을 전하라 하셨는데 공진(拱辰)도 역시 황구하여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바이니 속히 철병하고 화의하도록 하자는 뜻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거란군이 이미 창화현에 도착하였으므로 공이 직접 이 뜻을 전하였다. 거란 군이 묻기를, “국왕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公이 “국왕은 지금 강남으로 몽진하셔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거란 군이 다시 “강남은 얼마나 먼가”하니, 공은 “강남은 하도 멀어서 기만 리 인지 알 수 없다”하였다. 이로써 거란군은 추격을 멈추고 다음해에 하공(河公)과 호부원외랑 고영기(高英起)를 인질로 하여 철군하였으니, 이것이 즉 하공(河公)의 삼촌설(三寸舌)의 위력이었다. 적정에서의 하공(河公)은 겉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거란주의 총애를 받고 내심은 오로지 조국으로의 탈주뿐이었다.

 

드디어 하공(河公)은 고영기(高英起)와 밀모하여 거란의 성종에게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신등(臣等)이 병을 거느리고 가서 점검하고 오리다 하였다. 이에 거란주는 의심하지 않고 허락하였으나, 미구에 고려왕의 환도소식이 당도함에 따라 그것이 허위이었음을 알고 고영기(高英起)를 중경에 하공을 연경에 살게 하고 양가녀(良家女)와 혼인시켜 안주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하공은 좌절하지 않고 틈틈이 준마를 매입하여 동로(東路) 요역에 배치하고 환국을 도모하였는데 그만 비밀이 탄로되어 거란주의 친국을 받았다. 하공은 당당하게 “고려국의 신하로서 감히 두마음을 품을 수 없으니 너희들을 섬겨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거란의 성종이 공(公)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의 전향을 간청하였지만 하공(河公)은 언사를 더욱 불순하게 하여 급기야 심간을 꺼내어 씹히는 충렬(忠烈)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때는 현종 2년(1011) 12월이었다.

 

현종은 하공의 순국에 대하여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찬양하고 아들 칙충(則忠)에게 녹(祿)과 관자(官資)를 더하여 주었고. 문종 6년(1052)에는 왕이 친히, “통화 28년에 거란군 침입 시 하공진(河拱辰)은  일신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고 적에 대하여 삼촌설(三寸舌)로써 대군을 물리쳤다”고 치하한 다음 문하시랑평장사를 추증하며, 공신각상에 공의 영정을 모시도록 하고 아들 칙충(則忠)에게 오품직을 주었으며,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예종 5년(1110) 9월에는 왕이 재추고관과 천수전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우인이 연희로 하공을 칭미하므로 왕이 감격하여 공을 추념한 다음 공의 현손 내시위위주부 하준(河濬)을 합문지후로 삼고 시 일절을 지어 하사하였다. 이에 송하노니 공의 삼촌설(三寸舌)의 기지는 대군을 물리쳤고 조국 향한 일편단심은 피아의 심금을 울렸도다. 심간을 씹히는 장렬한 최후는 살신 구국의 표상이 되었고 그래서 지켜진 조국은 만세토록 면면하도다.

1994년 7월 상한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석(朴永錫)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