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인수(河仁壽)  1830년(純祖 30) ~ 1904년(高宗 41)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0대손이며, 진희(晉熙)의 5대손이다. 증조(曾祖)는 덕광(德廣)이며 조부는 석흥(錫興)이고 월촌공 달홍(達弘)의 독자(獨子)이다. 공의 자는 천지(千之)이고 호는 이곡(梨谷) 이며 옥종면 월횡리에서 태어나 7세에 모친상을 당하더니 애호(哀號)를 그치지 않고 혈루(血淚)가 옷깃을 적시었다. 어버이 뜻에 순응하고 가르침대로 따르며 호발(毫髮)의 위오(違忤)도 없었으며 잠시도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아니했다. 앉거나 일어서는 데에는 항상 정해진 자세를 취했으며 당실(堂室)에 거처할 때는 족슬(足膝)의 흔적을 두었다. 어버이 월촌공의 학문에 유염(擩染)되어 일찍부터 문행이 이루어지고 성리학에도 깊이가 있었다. 선공(先公)이 만세(晚歲)에 심양(心恙)이 있어서 가르치고 명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으나 어김없이 모두 따랐는데, 살고 있는 장옥(行廊)이 휴결(休缺)된 곳이 없는데도 고칠 것을 명하니 즉시 고쳤다. 사람들이 혹 이를 비난하면 이르기를,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떻게 감히 고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수년 동안 지내더니 선공(先公)의 심양은 마침내 물약(勿藥 : 약을 쓰지 못함)에 이르니 원근의 장보(章甫 : 선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타고난 자질이 남달라 부친 월촌공이 일찍부터 독서에 치중할 것을 강조하였고, 자라서는 부친으로부터 소학을 집중적으로 지도받았다. 당시 공부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 강 씨는 “그 아비의 그 아들이다.”라고 흐뭇해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월촌공은 자식이 재주만 믿고 게으름을 부릴까 염려되어 중용에 ‘남이 한번해서 능히 하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해보고, 남이 열 번해서 능하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해야 한다’ 는 구절에서 뜻을 취해 아들의 자(字)를 천지(千之)라고 지어주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월고 조성가와 함께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질의를 하였는데 공이 경서에 깊이가 있는 것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사는 친구인 월촌에게 글을 보내 “아들이 그대의 뜻을 잘이어 가니 그대 가문의 큰 복이 될 것이다. 누가 이를 뛰어 넘겠는가”라고 하였다. 1875년 만성 박치복, 이곡(尼谷) 하응로 등과 함께 한주 이진상(1818~1886)을 만나 강회(講會)를 가지면서 가학(家學)인 남명학에 퇴계학을 수용하였고 기호학계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당시 선비들이 남명 선생의 『학기(學記)』 및 『신명사도(神明舍圖)』를 다시 정리하여 바로 잡으려 할 때 공이 조변(條辨)을 자세하게 정리하여 선생의 본뜻을 천명(闡明)하였고 산천재에 머물면서 제생을 훈회하였다. 서예에도 능해 석봉 한호의 서법을 연구하여 필법이 정묘(精妙)하였으며 ‘개운루’ 등 많은 편액을 남겼다.

 

공이 세상을 떠나니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시(詩)로써 곡(哭)하여 이르기를 “효양(孝養)에 어김이 없는 것은 증 씨(曾子)의 뜻과 같고, 시명(詩名)은 또 종문(宗文)의 집에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사촌 박규호가 찬한 행장과 공산 송준필이 찬한 묘갈(墓碣), 백촌 하봉수가 저술한 묘지(墓誌), 그리고 공의 문집 2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