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백달(河伯達)  생졸 미상

 

공의 증조는 판서공 승해(承海)이며, 조(祖)는 참의공 경리(敬履)이고 부(父)은 사헌부 지평을 지낸 충(漴)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용모가 순수하였으며 자라면서 우람하고 무게가 있어 성인과 같았다.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가 단성현감 등 여려 수령직을 거쳤으며 사헌부 감찰을 지낸 후 통훈대부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파평윤씨는 인수부윤(仁壽府尹) 윤보로(尹普老)의 증손으로 지사간(知司諫) 윤수미(尹須彌)의 손녀이며, 좌윤(左尹) 윤자(尹慈)의 따님이다. 윤자(尹慈)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집의(司憲執義) 경기관찰사 한성부 좌윤(左尹) 등을 지냈는데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당질(堂姪)이 된다. 윤자(尹慈)의 매형(妹兄) 강맹경(姜孟卿)은 세조때 영의정을 지내게 되는데 강맹경은 공에게는 처 고모부(妻姑母夫)가 된다.

 

공은 아들을 두지 못했고 따님만 둘을 두었다. 큰 따님은 전의인(全義人) 이창윤(李昌胤)에게 시집갔다. 이창윤은 도총제 이승간(浩亭 河崙의 사위)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순전(李純全)의 손자이고 증좌승지(贈左承旨) 이건(李楗)의 아들이다. 이창윤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아들 공보(公輔)는 현감이었고, 증손(曾孫)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는 남명(南冥)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의병장이었으며, 종손(從孫) 신암 이준민(李俊民)은 남명의 생질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지낸 후 호정 선생의 외손으로 오방재(梧坊齋)를 창건하였다.

 

둘째 따님은 함안인(咸安人) 남계(南溪) 조수만(趙壽萬)에게 시집가 26세에 세상을 떠나니 다음해에 남계도 23세로 조세(早世)하였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찬(撰)한 남계의 묘갈에, ‘공의 부인은 하씨(河氏)로 진주에서 이름난 집안이다. 부친 백달(伯達)은 사헌부 감찰로서 고려 평장사 공진(拱辰)의 후손이다. 부인은 성품이 효순하고 부공(婦工)에 민첩하였으며 베 짜고 바느질하는 솜씨가 정교하여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듯했다. 경술(1490)년 8월에 산후병을 얻어 다음달 22일에 조세(早世)하니 26세였다. 부모가 그 자부(子婦)의 죽음을 슬퍼하고 함안군 방어산 기슭에 합장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남계의 아들 하구정(下鷗亭) 조응경(趙應卿)은 감찰을 지냈으며 자신이 강보에 쌓인 젖먹이로 양친을 여의고 성장하여서 부모 얼굴을 알지 못함을 지극히 애통해하다가 친척에게 물어 부모의 형상을 그린 화상을 봉안하고 제사 때는 반드시 펴서 모시니 관포 어득강(魚得江)이 하구정(下鷗亭)의 효심에 감복하여 ‛영당(影堂)’이란 시를 짓고 ‛남계처사진양하씨화상찬(南溪處士晉山河氏畵像贊)’이란 글을 남겼다. 하구정이 단성현감을 지낸 후에 자신의 외가인 진양하씨 족보를 편수하였는데 그 관련기록이 창주공의 ‛진양하씨족보서’에 나타나 있다. 남계의 손자는 참봉 언(堰)이며, 증손은 대소헌 조종도(趙宗道)이다. 대소헌은 함양군수를 지낸 후 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을 도와 큰 공을 세우더니, 1597년 정유재란 때 일가족을 이끌고 안음(安義)의 황석산성에 들어가 왜장 가토기요마시(加藤淸正)의 대군과 싸우다 일가족과 함께 몰사하였다. 대소헌의 장손 조징송은 송정공 하수일의 따님 금아와 혼인하여 송정공을 따라 다녔으므로 살아남았으나 그해 12월에 송정을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심병을 얻어 요절하였으며, 대소헌의 차손 조징성은 단지공 하협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