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경리(河敬履) : 생졸 미상

 

 

공은 병판공 거원(巨源)의 증손이며, 참판공 을부(乙桴)의 손자이고, 판서공 승해(承海)의 둘째 아드님으로 의정부 좌찬성 양정공 경복(敬復)의 아우님이다. 공은 일찍이 문음(文蔭)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태종 16년에 세워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에는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세종조에 양정공이 북방을 지키는 10년 동안 세종(世宗) 임금의 배려로 어머니 봉양을 위해 진주 주변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으니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단향비문(壇享碑文)

 

공(公)의 휘(諱)는 경리(敬履)이고 성(姓)은 진양하씨(晉陽河氏)이다. 시조(始祖) 휘(諱) 공진(拱辰)이 고려 현종 때 거란에 볼모가 되어 고려인으로서 충의(忠義)를 지켜 죽음을 당했다. 왕(王)이 그의 충절(忠節)을 높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증(追贈)했다. 수세(數世)를 전하여 휘(諱) 탁회(卓回)가 사문박사(四門博士)였고 이로부터 오대(五代)가 연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증조(曾祖)는 증 자헌병판(贈資憲兵判) 휘(諱) 거원(巨源)이고, 조(祖)는 증 가선병참(贈嘉善兵參) 휘(諱) 을부(乙桴)이다. 고 휘(考諱)는 승해(承海)로 증 정헌병판(贈正憲兵判)이요, 비(妣)는 보성선씨(寶城宣氏)이며, 좌명공신 문충공 호정(佐命功臣文忠公浩亭) 휘(諱) 륜(崙)이 종조숙부(從祖叔父)이다. 공(公)은 진주 서면 이하리(지금의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탄생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총민(聰敏)했고 학문에 독실(篤實)했다. 형 양정공(襄靖公) 휘(諱) 경복(敬復)이 세종조(世宗朝) 명신(名臣)으로서 십 오년간 북방수어(北方守禦)의 중임(重任)을 맡아오다가 경직(京職)으로 들어와서는 찬성직(贊成職)에 올라 국방에 관한 일을 전담하였다. 이와 같이 국사에 분주하여 노모를 봉양하지 못함을 크게 한탄하였다. 세종대왕은 양정공의 이와 같은 충정을 살피시고 아우인 공을 수령직(守令職)으로 진주 주위 구읍(九邑)의 은전을 내려 형공(兄公)을 대신해 모부인(母夫人)을 지성(至誠)으로 봉양토록 했다. 공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은 이러하다가 그 후 평안도 경력(平安道經歷)과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해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배(配)는 진주강씨이다. 공은 1남 3녀(一男三女)를 두었는데 아들 충(漴)은 문과에 올라 지평(持平)을 지냈고, 장녀(長女)는 사직(司直) 유봉(柳菶)에게 출가하여 삼남 일녀를 두었고, 2녀(二女)는 증참판(贈參判) 이개지(李介智)에게 출가해 4남 4녀(四男四女)를 두었으며, 3녀(三女)는 손수령(孫壽齡)에게 출가해 8남 1녀(八男一女)를 두었다. 충(漴)은 백달(伯達) 숙달(叔達) 계달(季達)의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녀(長女)는 이맹명(李孟明)에게 출가했고 2녀는 교리(校理) 성안중(成安重)에게 출가했는데 부사 여신(浮査汝信)이 그 증손이다. 백달(伯達)은 두 딸을 두어 장녀는 이창윤(李昌胤)에게, 2녀(二女)는 조수만(趙壽萬)에게 출가했으며 대소헌(大笑軒) 종도(宗道)는 그의 증손(曾孫)이다. 숙달(叔達)은 네 딸을 두었고 계달(季達)은 5남(五男)을 낳았는데 준(濬), 홍(洪), 심(深), 징(澄), 흡(洽)이다.

 

거듭된 병화(兵火)로 가문의 문적(文籍)이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으니 공(公)의 행적에 관한 문자(文字)는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주지(州誌)및 보첩에 간략하게 기록된 것뿐이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사사모견미전(謝賜母絹米箋) 및 사위모특가상전(謝慰母特加賞箋) 두 편(篇)의 유문을 보면, “국가를 위한 노고는 신자(臣子)의 분의(分義)에 당연한 바이온데 도리어 상사(賞賜)하셨으니 오직 감격(感激)할 따름입니다.”하였다. 이 유문(遺文)만으로도 공의 평생심행(平生心行)을 알기에 족한데 어찌 반드시 많은 문헌이 있어야 하겠는가. 양정공실기(襄靖公實記)에 부기(附記)된 참의공 사략 끝에 “공(公)이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했음은 곧 위로 왕을 속이지 않았고 아래로 백성을 병(病)들게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음이라 했고 국사(國事)에 분망(奔忙)했으나 스스로 수고(手苦)롭게 여기지 아니했음은 북산(北山)의 대부(大夫)보다 어질었고 만일 장수(將帥)가 되었으면 장성(長城)같이 믿을 만했을 것이며 재상(宰相)이 되었으면 주석(柱石)같이 의지할 만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능히 선대 절의(先代節義)를 이을 만한 것이었다고 했으니, 그 충성과 절의가 어찌 형공(兄公)에게 미치지 못했겠는가. 다만 모부인 봉양을 위한 효성으로 공(公)의 관직도 이에 이르러 그쳤으니 그 명수(命數)가 애석(哀惜)하기 이를 데 없다.

 

신후(身後)의 일은 더구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대개 공의 제사(祭祀)를 외손들이 받들다가 조역(兆域)마저 실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세사(歲事)마저 궐(闕)했으니 이 어찌 잔손들의 통한(痛恨)이 아니리오. 이번에 양정공 묘역을 정화(淨化)함을 계기로 제족(諸族)이 협의하고 양정공의 천좌(阡左)에 설단수비(設壇竪碑)하여 후손에게 공의 사적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하는 한편 조선(祖先)의 위덕(偉德)을 추모하는 곳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선조(先祖)를 더욱 숭봉(崇奉)하고 종족(宗族)끼리 돈목(敦睦)한다면 그 높은 덕(德)이 길이 빛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으리오.

서기 1965년 을축(乙丑) 중양절(重陽節)

법학박사 진양 강주진(姜周鎭) 근찬(謹撰)

 

참의공이 올린 사은전(謝恩箋)

 

•세종 6(1424)년 12월 19일

지곤남군사(知昆南郡事) 하경리(河敬履)가 사은전(謝恩箋)을 올렸는데, 이르기를, “신의 어미가 특히 성은(聖恩)을 받잡고 눈물을 턱까지 흘리면서 신에게 이르기를, ‘네 아비 승해(承海)가 태조를 섬기고 태종을 받들어서, 흐뭇한 총애와 은덕을 입어 전토와 노비까지 하사받고, 또 장례 때 미두(米豆)와 지촉(紙燭)을 내리셨다. 네 아비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은혜를 받은 것이 대단한데, 또 너의 형제가 아무 재주도 없이 태종을 섬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성은을 입어 영화로운 작록(爵祿)을 받았으니, 실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향자(向者)에 경복으로 하여금 동북방에 나아가 방어하게 할 때, 노첩(老妾)의 음식 공양을 걱정하고 너를 가까운 고을에 임명하여 모자의 정을 갖게 하셨으니, 전하의 과첩(寡妾)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는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또 나의 기한(飢寒)을 염려하여 특히 쌀과 비단을 내리시니, 과첩의 정(情)을 네가 대신하여 주상께 아뢰어라’고 하였습니다. 신 경리(敬履)는 생각하건대, 형 경복(敬復)이 왕명을 받고 변방에 나가 수(戍)자리 사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인데, 전하께옵서 직분상 당연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상을 주시고 신의 모친에게까지 미쳤으니, 신의 한 집은 여러 번 성은을 입사와, 신의 모친만 감격할 뿐 아니라, 선신(先臣)도 또한 지하에서 반드시 감동하여 울 것입니다. 신의 모자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고,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사례의 말씀을 올립니다.”하였다.

 

•세종 8(1426)년 7월 18일

지곤남군사(知昆南郡事) 하경리(河敬履)가 사은전(謝恩箋)을 올렸는데, 그 전(箋)에 이르기를, “신의 어미가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고 (감격하여) 울면서 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 전하께서 네 형 경복(敬復)이 동북방의 수(戍)자리를 방어하고 있으므로 과첩(寡妾)을 부양할 자가 없음을 민망히 여기시고 너에게 인근의 고을로 제수하시어, 그 자식 사랑하는 정에 부응하도록 하시고, 또 기한(飢寒)을 염려하시어, 지난해에 미백(米帛)을 하사하셨으니, 그 은혜 지극하거늘, 이제 또 1년이 못되어 재차 후하신 은사(恩賜)를 받으니, 지극히 감격한 나머지 할 말씀을 잊어 치사(致謝)할 길이 없고 다만 성수(聖壽)의 만년을 축원하며, 인하여 원하는 것은 하늘이 내 여년(餘年)을 더 주시어, 너희들이 마음을 다하여 봉직(奉職)하여 조금이라도 성상의 특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보았으면 하니, 너는 이 어미의 뜻으로써 전하께 상달하도록 하라.’하셨습니다. 신 경리는 곰곰이 생각하건대 신의 아비 승해(承海)가 태조와 태종조를 내리 섬겨 생전에 남다른 은총을 입었삽고, 죽어서도 부의를 내리시는 영광을 주셨으며, 신의 형 경복도 태종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작위(爵位)와 품질(品秩)을 높이시고, 전토와 봉록을 후히 하셨사오며, 신도 또한 아무 재능도 없는 몸으로서 누차 현직(顯職)에 제수되었사오나, 고을을 다스린 지 여러 해에 척촌(尺寸)의 공효(功效)도 없사온데, 도리어 자급(資級)을 더하시니, 성은의 우악(優渥)하심은 저 넓은 하늘과도 같이 그지없나이다. 또 생각하건대 신하된 분의(分義)에 분주히 외적을 막는 것이 족히 노고가 될 수 없고, 도거(刀鋸)와 정확(鼎鑊)도 족히 위태롭고 무서울 것이 못되는 일로서, 신의 형 경복은 직책이 외적을 방어함에 있사온즉, 그 초야(草野)의 도적들을 금하여 지식(止息)시킴은 분의상(分義上) 마땅히 할 바이온데, 전하께옵서 누차 상사(賞賜)의 은혜를 가(加)하와 신의 어미를 넉넉히 봉양하게 하시니, 신은 생각하건대 어미를 받들려는 마음은 유독 신의 형제만이 아니옵거늘, 천은(天恩)이 이 한미한 문호(門戶)에 편벽되이 극진히 하시니, 신의 모자(母子)는 감격하여 축수(祝手)하는 지극한 마음을 견딜 길이 없사와 삼가 치사의 말씀을 진달하여 아뢰나이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