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경호(河慶灝)  생졸 미상

 

초휘(初諱)는 경남(慶男), 자는 사회(士會)요, 호는 읍추헌(泣楸軒)이다. 망추정 천서(天瑞)의 아들이요, 진사 춘년(春年)의 손자이고 진사 취양(就洋)의 현손이며, 조산대부 운수당공(雲水堂公)의 5세손이다.

선조(宣祖) 때 별시 무과에 뽑히시어 선전관(宣傳官) 훈련부정을 지내고, 임란 때 체찰사 윤두수의 중군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상등(上等)의 공을 극력 사양하니 체찰사(體察使)가 당시 재상인 유성룡(柳成龍)에게 말하기를 입으로 공을 말하지 않고 여러 번 싸움에 현명하였다고 하니 이로 인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아 선조(宣祖)가 통군정(統軍亭)에 이르러 공(公)을 불러 선봉을 삼으니 외모(外侮)를 막고 무찔러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어가(御駕) 행차에 어려움이 없었다. 선조 38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공조참의,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하고, 아들 진룡(震龍)이 영국원종공신일등(寧國原從功臣一等)에 책록(策錄)됨으로써 1647년 2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大司馬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는 무육(無育)이고 계배(繼配) 정부인(貞夫人) 거창신씨(居昌愼氏)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인서(仁恕)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룡(震龍)이고 사위는 참판(參判) 남두병(南斗柄), 판관(判官) 강호량(姜好亮), 승의랑(承議郞) 정광원(鄭光元)이며 서자(庶子)는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 현용(見龍)이다.

 

공은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잠시도 노경(老境)의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고 서울에 부임할 때도 모시고 갔으며,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옛 예법을 좇아 정성을 다하는 데 힘쓰고 3년 동안 죽(粥)만 먹었다. 자호(自號)를 쌍부헌(雙負軒)이라 했는데 부모와 임금을 저버렸다는 뜻이다. 이산군수(理山郡守)로 있을 때, 청검(淸儉)과 신의(信義)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의리로써 돌보았기 때문에 만기(滿期)되어 돌아갈 때 관원과 백성들이 모두 나와 전송(餞送)하고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 선전관(宣傳官), 효력부위(効力副尉) 겸 선전관, 어모(禦侮)장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경력(經歷) 등이 모두 공이 역임한 바이다. 모년(某年) 2월 16일 본가에서 졸하였고 진주(晉州) 남쪽 30리 송곡면(松谷面) 인회산(仁會山) 간좌(艮坐)에 장사(葬事) 지냈다. 배위 박 씨(朴氏)와 쌍분(雙墳)이다.

태안박씨(泰安朴氏) 진사(進士) 증좌승지(贈左承旨) 능허당(凌虛堂) 민(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성징(聖澄)은 현신교위(顯信校尉)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차남 성철(聖澈)은 통덕랑(通德郞)이다. 박경(朴憼), 이세만(李世熳)은 두 사위이고, 서자는 성담(聖淡), 성정(聖淨)이다. (명와공 찬 행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