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재원(河載源)  1812년(純祖 12) ~ 1881년(高宗 18)

 

유명(幼名)은 천길(天吉)이요, 자는 덕언(德彦)이며, 호는 도곡(道谷)이다. 우현(愚顯)의 아들이고, 조부는 석위(錫緯), 증조는 용(溶)이고 통덕랑 한주(漢周)의 5세손이며, 운수당공 14세손이다.

 

철종 12년 신유(1861)에 성균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官)에 천거되었으나, 어머니 봉양을 위해 거절하고 귀향하였으며, 기품이 참되고 순박하고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봉양함에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다 갖추었고, 항상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경학(經學)과 효행(孝行)이 저세(著世)하여 고종 을사 1905년 5월에 정려(旌閭)와 표문(表文)을 받았다. 행의(行誼)로 입재랑(入齋郞)에 천거되었으며 문집 「도곡유집(道谷遺集)」이 있다.

 

배위는 의인(宜人) 인천채씨(仁川蔡氏)로 경진(景珍)의 따님이며 슬하(膝下)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백촌(栢村) 응용(應鎔), 황계(篁溪) 긍호(兢鎬), 호은(湖隱) 점호(漸鎬)이고 사위는 태안인(泰安人) 박주형(朴周衡)이다.

 

정려비기(旌閭碑記)

 

고종 42년 을사 1905년 5월에 조정에서 경상남도 관찰사 성기운(成岐運)의 글과 예식원 장례 이용직(李容稙)의 상주(上奏)에 따라 고 효자 성균 진사 하재원(河載源)에게 정려를 명하였다. 글을 살펴보니 공은 진주인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집례(執禮)가 어른과 같았고, 편모를 봉양함에 지극히 애경(愛敬)하여 몸소 맛있는 것을 구하여 드리지 않는 것이 없었고, 연세가 많아지니 병이 더욱 심해져서, 앉고 눕고 변소에 가는 것을 마음대로 못하게 되니 매양 옷의 띠를 풀지 않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곁에서 모심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실제의 일이다.

희(噫)라, 그 집과 마을에 표창하여 훌륭한 기풍을 세우는 것이 멀리 삼고(三古) 시대로부터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어왔는데, 우리나라는 더욱 성(盛)한 것 같다. 다만, 서양 문물이 들어온 이후로 한 번 변했으니 임오년의 일이고, 두 번째 변하였으니 갑신년의 정변(政變)이며, 세 번째 변한 것이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인데, 대저, 천지의 떳떳한 도리와 사람이 지켜야할 윤리 도덕과 사물의 이치가 정령(政令)의 시행과 언어 문자 사이에 부쳐 있는 것이 점점 깎이고 침식되어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생각건대 이 정려의 은전(恩典)이 왕왕 초야의 적막한 벽지(僻地)에 유급(流及)하니 그 연고를 알 만하다. 대개 사람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덕을 인(仁)이라 하는데, 인(仁)은 사랑이 주가 되고, 사랑은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간절한 것은 없다. 이에 효는 모든 선의 으뜸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사람이 생긴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쇠할 때나 성할 때나, 사람이 유순(柔順)할 때나 포악할 때나 갑자기 이것을 고치거나 바꾸어서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천지는 무너질 때가 있어도 이 도(道)는 무너지지 않으며, 일월은 어두워질 때가 있어도 이 도는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순의 도(道) 역시 효제(孝悌)에 불과할 따름인즉, 이 서양 물결이 천지에 도도(滔滔)하여 사람의 욕심이 횡류(橫流)하는 날을 당하여, 한 가닥 명의(名義)가 실처럼 끊어지지 않는 것은 비단 하(河)씨 일문의 경사일 뿐 아니라, 또한 난세(亂世)가 극에 달할 때 도덕이 순일한 치세(治世)를 생성(生成)하는 힘이로다.

하군(河君) 긍호(兢鎬)는 내가 남쪽에 있을 때 친한 벗이라, 천리에 와 기문(記文)을 청하니, 일이 중요하고 뜻이 근실하여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이에 기문을 쓴다.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