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지명(河之溟) : 생졸 미상

 

 

진강부원군 문정공 시원(恃源)의 증손이고 가선대부 한성 판윤을 지낸 유(游)의 삼자(三子)이다. 자(字), 호(號)와 생졸(生卒) 연대(年代)는 전해지지 않는다. 영락(永樂) 계묘(癸卯, 1423년)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고 초계(草溪 : 현 합천)군수를 지냈다.

 

공은 밀양에 거주하던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따님 재령이씨(載寧李氏)에게 장가들어 당시의 관습(慣習)에 따라 밀양과 세거지 원당(元堂)을 오가며 생활했다. 사재령(司宰令)은 고려 왕실 외손(外孫)으로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개경(開京)을 떠나 밀양부(密陽府) 조음리(棗音里)에 은거하였으며, 그의 넷째 아들 이오(李午)는 함안(咸安) 모곡리(茅谷里)로 옮겨 은거지 주위에 담을 쌓아 담 안을 고려동(高麗洞)이라 일컬었다.

 

공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자 현(現)은 진사에 입격한 후 사온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원당(元堂)에서 정곡(井谷)으로 이거(移居)했다. 이때부터 공의 9세손인 석계공(石溪公) 세희(世熙)께서 사곡(士谷)으로 이거할 때까지 송정가(松亭家)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차자(次子) 비(備)는 문음(文蔭)으로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당시의 관습(慣習)에 따라 외가(外家)의 세장지(世庄地)에 거주하게 되어 후손들이 밀양(密陽) 대항리(大項里)에서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계자(季子) 저(著)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손자(孫子) 백(伯)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후손들을 어모공파(禦侮公派)라 하며 사천(泗川) 사남면 병둔과 정동면 고자실(顧子谷)에서 세거(世居)해 왔다. 장녀(長女)는 진주인(晉州人) 부사(府使) 유시(柳蒔)에게 시집가고, 차녀(次女)는 의령인(宜寧人) 현감(縣監) 남치화(南致和)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