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순경(河淳敬) : 생졸 미상

 

 

공의 증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휘 거원(巨源)이고 조부는 한림학사 을숙(乙淑)이다. 공은 신호위 정용 산원을 지낸 염(濂)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문충공 호정 선생의 재종질(再從姪)이고 양정공의 재종제(再從弟)이다. 공은 1444년(世宗 26)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博士)·사헌부 감찰(監察) 등을 거쳐 1455년(世祖 卽位)에 좌익원종공신에 책훈되었고 성균관 직강(直講)을 지냈다.

 

세종 31년 6월 극심한 가뭄으로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수양대군 이유(李瑈)가 내향(內香)을 받들고 합장을 하였는데, 도승지 이사철을 비롯하여 참여한 관리 모두가 따라 하자 감찰(監察) 대감(大監, 祭監)이던 공도 따라하였다. 대감이 기우제의 예불(禮佛)에 참여하는 것은 제감(祭監)으로서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며칠 뒤 근신하기를 청하였지만 세종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 등이 제감(祭監)이 예불(禮佛)을 행한 것은 헌신(憲臣)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킨 일이라며 공의 파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때 세종임금은 “순경이 간사한 무리였다면 기우제에서 예불을 피하였을 것이나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순경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며 공의 파직을 끝내 하락하지 않았으니, 세종임금의 각별한 지우(知遇)가 있었다. 이후로 절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감찰도 부처에게 절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인 세종 30년 임금이 궁성 옆에 사찰(寺刹)을 세울 것을 명했을 때, 성균관 박사였던 공은 이로 인해 불교가 다시 만연하고 그 해악이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강력히 상소한바 있다. 공은 불교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억불정책을 추진하되 불교의 장점만큼은 계승하고자 했던 선초의 사대부와 뜻을 같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은 비록 세조 때의 원종공신이기는 하지만 공신들의 횡포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게 되어 일찍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세 아들 기룡, 기린, 기서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상경 종사하는 과정에서 가격(家格)이 더욱 신장 될 수 있었다.

 

공은 환향 후 수백 년의 세거지(비봉산 아래 중안동)를 떠나 진주부 동쪽 대여촌(현 금산)으로 이주하였고, 공의 아들 통찬공(諱 起龍)이 대여촌을 떠나 진주부 북쪽 사죽리(沙竹里) 단동(丹洞)으로 이주 하였다. 이후 주거의 편리함과 물자의 풍부함을 바탕으로 후손들이 하씨 집성촌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반촌(班村)으로 발전시켜 이른바 단목 하씨로 예칭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