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비(河   備) : 생졸 미상

 

 

진강부원군 문정공 시원(恃源)의 현손이며 통정대부 부윤 윤구(允丘)의 증손이고, 한성판윤 유(游)의 손자요 초계군수 지명(之溟)의 아들이다. 진주 수곡면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하다가 외가가 있는 밀양 대항으로 전거하였다. 공은 오위(五衛)의 부사직을 지낸 후 선략장군(宣略將軍) 호군(護軍)에 특제(特除)되었으나 1455년 단종 손위(遜位)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호군공파(護軍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묘갈명(墓碣銘)

 

밀주(密州)의 대항리는 우리 하씨가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 하씨가 거처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호군공(護軍公)에서 비롯된다. 공의 휘는 비(備)이고 단종조의 사람이다. 진양에서 태어나 만년에 밀주(密州 : 密陽)로 이거(移居)했다. 이곳 밀주에서 돌아가셨으며 밀주 동쪽의 구대곡(九岱谷) 명당에 장사지냈다. 공의 배위 곽 씨(郭氏)의 묘(墓)는 진주의 효자동에 있다. 대저 임진란 때 밀양은 마침 그 충돌지점에 위치하여 공의 후손들은 전전하다가 죽음(漂泊顚喪)을 면하지 못하였다. 문헌 또한 소실되었기 때문에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아! 통탄스럽도다.

 

우리 하씨의 계통은 진양에서 나왔고, 고려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 공진(拱辰)을 시조로 삼는다. 이후로 대대로 잠영(簪纓)이 이어졌다. 8대에 이르러 휘 식(湜)은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와 진강군(晉康君)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휘 시원(恃源)은 우의정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의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부 휘 윤구(允丘)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을 지냈으며, 조부인 휘 유(游)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아버지 휘 지명(之溟)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고, 어머니는 숙인(淑人)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안렴사(按廉使) 일선(日善)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15~16세에 이르러서는 시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관직은 선략장군(宣略將軍) 호군(護軍)에 이르렀고, 관직에 있을 때 충성과 의리로 스스로를 격려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공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당시의 일에 미치자 강개하여 오열하였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공의 평생의 큰 줄거리다. 배위 영인(令人) 포산곽씨(苞山郭氏)는 의영고사(義盈庫使) 득종(得宗)의 따님이며,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 구천(遘千)은 생원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과 도의로 사귀었다. 차남 치천(値千)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를 지냈고, 3남 수천(受千)은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딸은 이숙정(李叔貞), 전맹원(全孟元), 정원종(鄭元宗), 남치신(南致信)에게 출가하였다. 구천(遘千)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주(澍)는 현감을 지냈고, 차남 충(沖)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호(號)를 돈재(遯齋)라 하고 점필재(佔畢齋)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삼남 순(淳)은 진사이며, 사남 영(泳)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딸들은 이희적(李希績), 손난줄(孫蘭茁), 어득호(魚得湖), 민여익(閔汝翼)에게 출가하였다. 치천(値千)의 아들 풍(渢)은 문과(文科) 현감(縣監)이고, 개(漑)는 참봉(參奉)이다. 수천(受千)의 딸은 이구년(李龜年), 이광로(李光輅)에게 시집갔다. 주(澍)의 딸은 점필재의 손자 김륜(金綸)에게 시집갔다. 충(沖)의 아들 종영(宗嶸)은 참봉을 지냈고, 종억(宗嶷)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으며 호(號)는 낙포(樂圃)이다. 딸은 유방춘(柳芳春), 장심(張心)에게 출가하였다. 순(淳)의 아들 종수(宗峀)는 참봉을 지냈으며 영(泳)의 아들은 종헌(宗巘)과 종서(宗嶼)이다. 풍(渢)의 아들 종악(宗岳)은 진사(進士)이고 차자(次子)는 종암(宗嵓)이다. 개(漑)는 종무(宗嵍)와 종계(宗계)의 두 아들을 두었으며 딸은 신경심(申景深)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공(公)은 일찍이 불행한 시대를 관리로 더 이상 나아갈 뜻이 없었으니 향리에 물러나 가업(家業)을 세웠고, 화락하고 단아함을 백세에 흐르게 하였으니 실로 아름다운 것이다. 공(公)은 본래 역경(易經)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학문에 정통하여 대항에 거처를 정하였다. 처남(妻男) 해남 현감(縣監) 곽안방(郭安邦) 공이 와서 보고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이 땅은 자손만대의 복 받을 터가 되기에 충분하도다. 남천의 물이 말라도 하씨는 없어지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공이 베푼 은덕의 무궁함과, 우리 하씨 자손의 경여(慶餘)와 오래도록 발전함으로 가히 징험이 된다. 공(公)의 후손(後孫 : 苗裔)들은 흠모와 감격으로 칭송(稱誦)이 그치지 않는데,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며, 이어 명(銘)을 짓는다. 명(銘)에 이르되,

“아! 이곳 수동이여, 훌륭하신 공(公)이 터 잡은 곳이로다. 좋은 사람의 복 받은 땅이라, 그 후손이 이리 번창하도다. 후인의 엉긴 정성을 비석에 새겨 추모의 정을 붙이오니, 영원한 향불에 영혼의 오르내림이 양양하소서”

임인(壬寅)년 3월

후손(後孫) 재용(載用)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