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충(河   沖) : 1466년(世祖 11) ~ 1525년(中宗 20)

 

자(字)는 충포(冲圃), 호(號)는 돈재(遯齋)이다. 호군 비(備)의 손자이고 구천(遘千)의 아들이다. 공의 조부 호군공(諱 備)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를 찾아가 수양대군의 불의(不義)에 비분강개한 마음을 토로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수곡 효자동에 잠시 은거하였다가 외가(外家)가 있는 밀양 수동(대항리)으로 이거하였다. 부친 생원공(諱 遘千)이 근동(近洞)에 사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도의로 교유하게 되면서 공이 점필재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공은 소싯적부터 총명하여 다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15세부터 이미 시로서 이름을 날렸다. 뜻이 돈독하여 점필재가 칭송하기를 “학문이 깨끗하고 순정(純正)하여 의리가 분명하니 능히 가르칠 만하다. 그 행의(行誼)의 덕이 결코 작록(爵祿)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사과를 거쳐 성종 17년(148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正字),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치면서 성종의 문치(文治)를 보필하였고 매양 경연에 입시하여서는 성의가 간간(懇懇)하여 성종이 공을 매우 중히 여겼다.

 

연산이 즉위한 후 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행위를 수차례 간(諫)하였으나 깨닫지 못하자 사직소를 올리고 연산 원년에 귀둔(歸遯)하였다. 공이 은거한 3년 뒤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점필재의 문하생을 비롯한 영남출신의 신진사류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스승 점필재마저 부관참시의 화를 입자 공은 화왕산으로 들어가 산채(山菜)로 연명하며 사흘 동안 통곡하였다. 해불시(解紱詩)가 전해진다.

 

배위는 숙인(淑人) 순천박씨(順天朴氏)로 집의(執義) 문유(文孺)의 따님이며 두 아들을 두었으니 종영(宗嶸)과 낙포(樂圃) 종억(宗嶷)이다. 돈재집(遯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