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락(河   洛) : 1530년(中宗 25) ~ 1592년(宣祖 25)

 

자는 도원(道源)이요, 호는 환성재(喚醒齋)이니 환성재공파(喚醒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초계군수(草溪郡守) 지명(之溟)의 5대손이고,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현(現)의 현손(玄孫)이며 생원· 진사를 지낸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남명(南冥)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1568년에 증광시에서 진사과 장원을, 생원과 1등 2위로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천거되었다.

 

임란(壬亂) 때 상주성(尙州城)에서 부자(父子)가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지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환성재집(喚醒齋集)이 있다.

 

묘갈명(墓碣銘)

 

영남에는 예로부터 걸출(傑出)한 인사가 많은데, 공은 바로 진양(晋陽) 사람이다. 북쪽으로 나아가 배웠는데 아무도 앞서는 사람이 없었으니 진정 걸출한 인물이다. 공의 성은 하(河)요 휘는 낙(洛)이며, 자는 도원(道源)이고 스스로 호를 환성재(喚醒齋)라 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의 진사·생원시(進士生員試)에 제2등으로 입격하였다. 아우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같이 남명 선생(南冥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형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학문에 독실했고 이(理)에 밝았으므로 모두 학문과 행실이 있다고 일컬었다.

 

공은 추천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고 우계(牛溪)·율곡(栗谷) 두 선생과 서로 도와 학문을 닦는 도움이 있었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간에 당시의 논의가 상반되어 우계·율곡 두 선생이 비방을 받아 무고(誣告)가 심했는데, 공은 항의하는 소(疏)를 올려 환하게 변명하니 명성은 더욱 드러나고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로부터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물러나 상주(尙州)로 돌아갔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난리에 산중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이곳의 성주(城主)가 일을 논의하기 위해 공을 청하였다. 공이 고을로 들어가자 적이 갑자기 나타나 공은 죽음을 당하였다. 아들 하경휘(河鏡輝)는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의 생원(生員)이었다. 평소 어버이 섬기기를 예로 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공을 따라 들어갔는데, 적이 먼저 공을 범하자 이에 칼을 향해 슬피 부르짖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조정에서 그 여(閭)에 정표(旌表)하였다. 이에 부자(父子)가 또 충(忠)과 효(孝)로 이름이 났다.

 

공의 선대(先代)로 여조(麗朝)의 하공진(河拱辰)은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치(留置)된 지 3년에 굴하지 않고 죽어 포장(襃章)되어 동평장사(同平章事)가 증직(贈職)되었고, 그 아들 하칙충(河則忠)은 음사(蔭仕)하였으며 이가 하탁회(河卓回)를 낳으니 문과(文科)에 올랐고, 이가 하정재(河挺才)를 낳으니 한림(翰林)이며 한림 뒤 3세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3세 뒤에 하식(河湜)은 진강군(晉康君)이요, 하시원(河恃源)은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며, 하윤구(河允丘)는 부윤(府尹)이요, 하유(河游)는 판윤(判尹)이다. 판윤이 지명(之溟)을 낳고 지명(之溟)이 하현(河現)을 낳으니 직장(直長)이요, 하응천(河應千)은 진사이며, 하형(河瀅)은 현감(縣監)이요, 하인서(河麟瑞)는 생원·진사에 모두 입격하니, 곧 공의 4대(代)이다. 광해군(光海君) 때 공이 일찍이 사부(師傅)였으므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하였고 그 손자 하선(河璿)에게 벼슬이 내려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승진해서 감찰(監察)이 되었다. 공을 상주에 장사지냈다가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공과 생원(生員, 하경휘)의 묘를 진주(晉州)로 이장하였는데, 장차 모년(某年) 월일에 고을 서쪽 모향(某向)의 언덕에 영구히 장사지내기 위해서였다.

 

감찰은 곧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의 진사(進士)로서 나와 동방(同榜)이다. 나이 70여 세에 동년(同年)이란 뜻에서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나를 찾아와 간절히 명(銘)을 청하였다. 감찰은 반정(反正) 뒤에 찰방(察訪)에 제수되어 지금은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니 장사(葬事)를 위해서이다. 그 성의가 지극하고 그 뜻은 슬프다. 나는 글을 할 줄 모르나 어찌 그 소망을 막을 수 있으며, 또 어찌 차마 그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들어앉아 경전(經傳)을 궁구하여 온갖 행실의 근원(효도를 이름)을 하였고, 나아가 의(義)를 행하여 대현(大賢 : 우계·율곡)의 억울함을 바루었다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죽어 충(忠)과 효(孝) 더욱 드러났으니, 천추(千秋)에 조각돌은 길이 그 아름다움을 유전하리.

영상(領相) 전주(全州) 이경석(李景奭) 찬  (출처 : 국역 국조인물고)

 

광해 사제 왕자사부 하락문(光海賜祭王子師傅河洛文)

 

•광해 2년(1610년) 8월 22일

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생각건대 과인(寡人)은 실로 예전의 공부에 힘입어 이 대위(大位)에 올랐으니, 어찌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슬픔을 견디겠는가! 이에 한 품계(品階)를 내리어 구원(九原)에 계시는 영혼을 위로하노라.

 

생각건대 경(卿)은 산과 바다의 정기(精氣)를 받아서 정주(程朱)의 성리학에 뜻을 두었는데,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일찍이 소과(小科)에서 장원(壯元)을 하였으며, 사부(師傅)의 직임이 있음에 맨 먼저 왕자(王子) 가르치는 직임을 받았도다. 욕되게도 왕궁에 드나들게 하여 몇 년 동안 교도(敎道)를 받았는데 그만 아쉽게도 향리로 돌아가고 말았도다. 의(義)에 입각하여 한번 죽고 말았으니 원망스럽구나, 하늘이 알아주지 못함이여! 지금 아득히 그리워하는 심경이 일어나 더욱 추모하는 정이 깊어지노라. 이에 그대에게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추증하노라. 아, 공덕을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에는 슬픔과 영광이 이미 나란히 있는데 정성을 받아들이는 마음만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에 멀리서 맑은 술잔을 진설하노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기를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