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윤린(河允潾) : 1321년(忠肅王 8) ~ 1380년(禑王 6)

 

 

시조로부터 10세(世)이며 자(字)는 소개(所開)이다. 문정공(文貞公)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 휘 시원(恃源)의 2남 2녀 중 장남이다. 26세 때인 1346년(忠穆王 2년, 丙戌)에 환로(宦路)에 들어 식목도감 녹사, 선관서승, 선관서령, 문화부 녹사,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순흥부사(順興府使) 등을 역임하고 아들 문충공 휘 륜(崙)의 현달(顯達)로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1380년에 향년(享年) 60세로 졸(卒)하니 묘소(墓所)는 진양군(晉陽郡, 現 晉州市) 미천면(美川面) 오방리(梧坊里) 계좌(癸坐)에 상하장(上下葬)이다. 이 묘역(墓域)은 문정공 내외분, 진양부원군 내외분, 문충공 내외분 등 6기의 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1977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고, 오방재(梧坊齋)에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비명(碑銘)을 새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진양부원군 신도비명(晉陽府院君神道碑銘)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하공(河公) 신도비명(神道碑銘) - 서문도 아울러서 -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승부윤(敬承府尹)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변계량(卞季良) 지음.

영락(永樂) 13년 을미(乙未, 1415) 겨울 12월에,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호정 선생(浩亭先生)이 계량(季良 : 변계량)에게 부탁하시기를,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는 덕(德)을 심어 후손들을 위해서 넉넉히 은택(恩澤)을 끼쳤기에 나 이 보잘것없는 자식이 두 번이나 공신(功臣)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외람되게 높은 관직에 올랐고, 또 임금님이 내리는 은혜로운 특전(特典)을 입어, 위로 3대에 걸쳐 봉호(封號)를 받거나 증직(贈職)을 받았소. 이에 묘소 가는 길에 비석을 세워 다가오는 후세들에게 보여야 하니, 마땅히 문장이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대는 글을 지어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계량(季良)이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요, 휘(諱)는 윤린(允潾), 자(字)는 소개(所開), 진양(晋陽)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윗대 조상 가운데 고려(高麗) 때 벼슬해서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낸 휘 공진(拱辰)은 현종(顯宗) 때 공훈이 있어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 휘(諱) 탁회(卓回)는 고종(高宗, 1213~1259) 때 벼슬했는데, 부모님이 연로하였기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사(博士 : 卓回)가 정재(挺才)를 낳았고, 정재가 남수(南秀)를 낳았고, 남수가 소(邵)를 낳았고, 소(邵)가 휘(諱) 부심(富深)을 낳았는데, 공(公)에게 증조부가 된다. 박사로부터 아래로 4대에 걸쳐 계속해서 과거에 올랐다. 증조부와 그 형님 호(浩) 및 부(扶)도 모두 과거에 올랐다. 나라의 제도에 따라 그 어머니에게 녹(祿)을 지급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조부 휘(諱) 식(湜)은 증순충보조공신(贈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강군(晋康君)이다. 부친 휘(諱) 시원(恃源)은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정승(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정균(鄭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치(至治) 신유(辛酉, 1321년) 4월 정사일(丁巳日)에 공을 낳았다.

 

자질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7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곡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경오(庚午, 1330, 10세)년에 처음으로 스승에게 공부하러 나갔다. 계유(癸酉, 1333)년에 고을의 어른 증숭록대부(贈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 판호조사(判戶曹事) 강승유(姜承裕) 공이 보고서 기특하게 여겨 그 딸을 시집보냈다. 강공(姜公)은 성격이 엄하였는데, 공은 아버지처럼 섬겼다.

 

지정(至正) 병술(丙戌 1346, 26세)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 1344~1348)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목도감(式目都監) 녹사(錄事)가 되었다.

 

정해(丁亥 1347, 27세)년 봄에는 강 씨가 길한 꿈을 얻어 임신을 했다가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곧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다.

 

임진(壬辰 1352, 32세)년에 선관서승(膳官署丞)에 제수되었다. 을미(乙未 1355, 35세)년에는 선관서령(膳官署令)으로 승진하였다. 병신(丙申 1356, 36세)년에는 문하부(門下部) 녹사(錄事)로 옮겼다. 고려 말엽에는 문하부의 크고 작은 물자 공급을 녹사에게 맡겼으므로, 녹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그만두려고 했다. 공은 마음을 다해서 마련하기를 도모하니, 문하부의 관원들이 칭찬하였다. 무술(戊戌 1358, 38세)년에는 선덕랑(宣德郞) 북부령(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庚子 1360, 40세)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상복(喪服)을 입고 상주 노릇하여 상기(喪期)를 마쳤다.

 

계묘(癸卯 1363, 43세)년에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었는데, 품계는 조봉랑(朝奉郞)이었다. 실로 공민왕(恭愍王) 13년이었으니, 가짜 왕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 덕흥군)가 몽고족(蒙古族) 군대와 한족(漢族) 군대를 거느리고 장차 고려를 침략하려고 했는데, 여러 도(道)의 군대가 서북지방에 모였다. 가짜 왕이 패배하여 달아났는데,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모두 숙주(肅州)를 경유하였다. 공은 이들을 대접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 해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돌아온 군사들은 굶주려서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이 많았다. 공은 자신의 녹(祿)을 덜어내고, 또 고을 사람 가운데서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여 도와 구제하게 하여 살린 사람이 많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어짊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일을 없애고 형벌을 줄이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은덕(恩德)을 입었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과 교대하게 되자, 눈물을 흘려 울면서 전송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을사(乙巳 1365, 45세)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해 가을에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해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들이 있어 조정에서 벼슬하니, 나는 다시 벼슬할 필요가 없도다.”라고 하고는, 고을의 노인들과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느긋하게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왜구(倭寇)가 한창 날뛰었다. 공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섬 오랑캐들이 해마다 침략해 오고 있소. 서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데, 형세를 보니 반드시 읍내까지 오겠소. 의당 북쪽 마을로 가서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고는, 정사(丁巳 1377, 57세)년에 집안을 이끌고 동곡(桐谷)으로 가서 집을 지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 과연 왜구가 읍내까지 왔으므로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은 동곡에서 강성현(江城縣)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 온 집안이 홀로 온전할 수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했다.

 

의정공(議政公)이 그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재상(宰相)에게 글을 올리기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곳에 섬 오랑캐가 자주 이르니, 저는 잠시도 편안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순흥부사(順興府使)는 유학자(儒學者)입니다. 바라건대, 저 대신 그 사람을 대사성에 임명하시고, 저 부친을 순흥부사로 임명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재상이 그 말을 의롭게 여겼다. 경신(庚申 1380, 60세)년 가을에 공을 부사로 임명했는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이 이전에 공은 원외랑(員外郞) 관직에 임명되어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그래서 옛날 품계(品階)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부임하여 은혜로운 정치가 있어 백성들이 바야흐로 흠모하면서 좋아하였으나, 병이 나 9월 24일에 부인 강 씨(姜氏)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나이가 육십이고, 아들도 뜻대로 다 잘 되었으니, 무슨 남은 한이 있겠소?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길거나 짧거나 하는 것은 천명(天命)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가 다 끝나는 데로 돌아가지요. 단지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만 있을 따름이니, 상심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의정공은 부친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이틀을 급히 달려 이르렀으나, 운명(殞命)하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영구(靈柩)를 받들어 진양(晋陽)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해 12월 갑인일(甲寅日)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산에 안장(安葬)하였다. 공(公)의 어머니 묘와는 9보(步) 떨어져 있고, 또 그 북쪽 아버지의 묘와는 10보 떨어졌다. 관(棺)은 통나무를 그대로 쓰고, 곽(槨)은 7촌 두께로 했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필요한 모든 도구는 문공(文公 : 朱子)이 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전적으로 의거하였다.

 

우리 조선왕조(朝鮮王朝) 무인(戊寅, 1398)년에 의정공(議政公)이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양백(晋陽伯)을 추증(追贈)하였다. 임오(壬午, 1402)년에는 의정공이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을 더해주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두텁고 무거우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였다. 평생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고, 또 농담을 한 적도 없었다. 재산을 늘리는 것에 마음을 둔 적도 없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고,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냈고, 고을에서는 온화하게 처신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숙부가 노비를 고루 나누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아우나 조카들이 관가에 소송을 하려고 하자, 공은, “어찌 감히 숙부와 다툰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그들을 말렸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와 조카들이 전에 소송하려던 말을 강하게 주장하자, 공은 또 “종형제끼리 어찌 서로 소송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우와 조카의 자손과 재종형제들이 소송하여 요청하니 관가에서 나누어주었다. 의정공(議政公)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하려고 하지 않던 바이다”라고 했다. 여러 아들들에게 주려고 하자, 의정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들이 받는 것이 곧 내가 받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강 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고 늘 예법을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 자손들을 가르치는 것은 엄하면서도 이해를 잘했고, 일가나 인척들을 대하는 데는 은혜로우면서도 두루 마음이 미쳤다.

 

을해(乙亥, 1395)년에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 때 의정공(議政公)은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있었는데, 임금님을 뵈옵고 휴가를 요청하여 역마(驛馬)를 달려 3일 만에 이르렀다. 약을 맛보고서 바치니 강 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아 너의 영광스런 봉양을 보게 되었으니, 약을 마셔서 살기를 구하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하셨다. 의정공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권했다. 7월 초4일에 의정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늙었느냐 젊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누이가 모두 아무 탈이 없으니, 내가 이제 먼저 가는 것이 어찌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약을 억지로 들이려고 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 이튿날 한평생을 마치니, 76세였다. 9월 병오일(丙午日)에 공(公)의 묘소의 남쪽 11보(步) 되는 곳에 붙여 안장하였다. 무인(戊寅, 1398)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은 휘 륜(崙)인데,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 영경연춘추서운관사(領經筵春秋書雲觀事) 세자사(世子師)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성산(星山) 이공(李公) 휘(諱) 인미(仁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병술(丙戌, 1406)년에 부인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공의 따님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시집갔다.

의정공(議政公)의 아들 구(久)는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도총제(都摠制)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 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의정공의 맏따님은 이조우참의(吏曹右參議) 홍섭(洪涉)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 따님은 좌군도총제부(左軍都摠制府)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의정공의 서자가 셋인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다. 영(永)은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대호군(大護軍)이다.

부사(府使 : 柳克恕)의 아들 유정(柳汀)은 호조정랑(戶曹正郞)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의정공(議政公)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이름과 공훈의 융성함은 견줄 데가 없다. 진실로 생각해 보니, 반드시 그 복록(福祿)을 발하게 된 유래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아! 진양공(晋陽公 : 允潾)이 착한 일을 계속하고 덕(德)을 이루었으니, 그 보답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자신에게서 받지 못 한 것은,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기 위해서 늦춘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는데, 나는 진양공에게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흘러내린 은택(恩澤)이 오래 가고 남긴 경사가 긴 것이 끝이 있겠는가? 아아! 훌륭하도다. 명(銘)은 이러하다.

 

흐름이 펼쳐져 나가려면, 有流斯張

그 원천(源泉)이 쌓여 있어야 한다네. 維蓄其源

가지가 무성하려면,  有枝斯茂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네.  維固其根

훌륭하도다! 하씨는, 懿哉河氏

실로 덕(德)이 있는 가문이로다.  實惟德門

우뚝한 저 좌사낭중(左司郞中 : 河拱辰)은,    卓彼左司

특별한 공훈이 있었다네. 克有殊勳

이에 그 덕(德)을 두터이 쌓아,   乃厚其積

후손들의 길을 열어주셨도다. 以啓後昆

미덥고 후하신 진양공(晋陽公 : 河允潾)이시여!    振振晉陽

오직 덕(德)을 부지런히 닦았다네.    惟德是勤

천륜(天倫)을 중히 여겨 집안의 송사 막았도다.    厚倫息訟

사람들은 그 의리에 감복했네.     人服其義

집을 옮겨 왜구를 피했나니,  移家避寇

사람들이 그 지혜에 탄복했도다.  人服其智

두 고을을 은혜롭게 다스렸나니,  惠于二州

백성들은 부모처럼 사모했네. 民慕怙恃

의롭고 지혜롭고 또 은혜 베풀었으니, 義智且惠

현달하여 이름나는 것 마땅하건만,    顯融是宜

다 거두고 물러나 고향 집에서 살아가,    斂而家居

마침내 경륜을 펼치지는 못했다네.    竟莫以施

하늘이 후손을 내려주어, 天錫爾類

영명하고 어진 인물 낳았도다.    乃生英賢

우리 성스러운 임금님을 도우시어,    相我聖主

지위가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 으뜸이었네.     位極朝聯

차분하게 조정에서 일을 처리하여,    從容廊廟

여러 가지 업적이 높았도다.  庶績維隆

공훈과 은덕(恩德)은 으뜸이고,   勳德之魁

유학의 최고 대가였네.   斯文之宗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정승이여!   王曰政丞

실로 나와 덕(德)을 같이하였나니,    實予同德

사직을 안정시키고 천명을 도운 그대의 큰 공적을, 定社佐命

내가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오.”  懋乃丕績

위로 삼대에 벼슬을 추증하시어,  追爵三世

그 관직이 모두 다 높았다오. 並峻其秩

정승공(政丞公 : 河崙) 공훈으로 품계 받으니, 旣勳而階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관직 높았다네. 領府維崇

모친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여,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했다네.  辰國是封

잠겨있던 덕이 크게 드러남에,    不顯潛德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 계신 것과 같았네.  雖死猶生

진산(晋山)은 높고 높고, 晉山峨峨

진수(晋水 : 南江)는 넘실넘실 흘러가는구나.  晉水泠泠

저 감산(坎山) 기슭을 바라보니,  瞻彼坎麓

길한 기운 모였도다. 維吉之叢

아버님 어머님이,    維考維妣

다 그 속에 안장됐다오.  俱葬于中

계속 흘러내려가는 경사는    綿綿流慶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曷其有終

우람한 비를 새겨서,     刻銘豐碑

가없는 오랜 후세에 알린다네.    以告無期

밝은 후손들이여!    昭玆來裔

누구인들 공公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孰不公思

 

임진(壬辰, 2012)년 3월 25일

문학박사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교수 허권수(許捲洙) 삼가 번역함.

 

 朝鮮國贈領議政河公神道碑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幷序

嘉靖大夫敬承府尹修文殿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 卞季良撰

 

永樂十三年歲在乙未冬十二月議政府左議政浩亭先生屬季良曰惟我先考種德裕後而予小子再與勳盟濫登峻秩且承恩典封贈三世此其碑于墓道以示來世者宜有辭而闕焉子其筆之季良不敢辭謹按公姓河氏諱允潾字所開晉陽望族也先世仕高麗左司郞中諱拱辰有功顯王朝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四門博士諱卓回仕高王朝以親老免官還鄕博士生挺才挺才生南秀南秀生邵邵生諱冨深於公爲曽祖自博士而下四世相繼登第曾祖公與其兄浩及扶又皆登第以國制廩其母時人歆之祖諱湜 贈純忠補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考諱恃源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之女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生公姿質異凡兒年七歲丁內憂哭泣盡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癸酉鄕之長者 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姜公諱承裕見而奇之以其子妻之贊成性嚴公父事之至正丙戌始仕忠穆王朝爲式目都監錄事丁亥春姜氏得吉夢有娠冬十二月生男卽議政公也壬辰授膳官丞乙未陞爲令丙申遷門下錄事高麗之季門下府大小供億一委錄事爲錄事者率多乞免公盡心營辦府官稱之戊戌拜宣德郞北部令庚子遭外艱終制癸卯知肅州郡事階朝奉郞實恭愍王十三年也僞王塔帖木兒率蒙漢兵將入寇諸道軍會西北僞王敗走其將帥往來皆道于肅公待之無闕其年飢軍士還者多菜色公減俸祿又勸郡人之有蓄者相助賑濟多所全活爲政以仁恕爲本抽歛絶而刑罰省吏民德之及其見代至有涕泣以送者乙巳春還鄕秋議政公登第明年選爲史官公曰有子立朝矣吾不必復仕乃與鄕之父老結爲金剛社優遊卒歲時倭寇方熾公語族人曰吾鄕濱海島寇歲至西南人先受其害勢必及邑里宜就北村以避其鋒至丁巳秋挈家結廬于桐谷明年秋寇果入邑人多被劫掠公自桐谷入江城縣之山城擧家獨全鄕人服公先見議政公時爲大司成上書宰相曰老親所在島夷數至吾未嘗頃刻而自安今順興府使儒者也乞以自代除父順興宰相義其言庚申秋授公府使階奉翊先是公嘗受員外官至奉翊大夫禮儀判書故因其資云旣至有惠政民方慕悅而疾作九月二十四日謂夫人姜氏曰吾年六十子亦成立有何遺恨況人生脩短莫非天命皆歸於盡只有先後耳勿傷心語竟乃絶議政公聞病備藥疾馳二日而至不及屬纊辟踊摧折奉柩歸于晉陽晝夜不離側以其年十二月甲寅葬于桐房洞坎山之岡北距先妣墓九步又其北距先考墓十步棺用全木槨用七寸凡喪葬之具一依文公家禮至國朝戊寅以議政公定社功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兵曹事晉陽伯壬午以佐命功加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公稟資厚重操履廉簡平生不妄語亦無戱言未嘗以營産留意孝友出於天性睦於族親和於鄕黨愉愉如也先考早逝叔父不肯均分蒼赤弟姪欲訴於官公曰安敢與叔父爭止之叔父沒弟姪以前言强之公又曰從兄弟亦豈可相訟及公沒弟姪之子孫與再從兄弟訟諸官分之議政公不受曰吾先子所不爲也請與諸子公曰諸子受是吾受也竟不許姜氏善治家動循禮則奉親以孝事夫以順敎子孫嚴而恕待族姻惠而周乙亥夏寢疾議政公時爲中樞院使謁告馳馹三日而至嘗藥以進姜氏曰汝父逝己久吾至今未亡足見汝榮養不願飮藥求生也公涕泣以勤七月初四日謂議政公曰人之死生不在老少汝及汝娣俱無恙吾今先逝豈不自幸不須强進諸藥明曰卒年七十六以九月丙午附于公墓之南十一步戊寅 贈辰韓國大夫人男諱崙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晉山府院君娶奉翊大夫禮儀判書星山李公諱仁美之女丙戌封辰韓國大夫人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恕議政男久中軍都摠制府都摠制娶知密直司事李公種德之女長女適吏曺右參議洪涉次女適左軍都總制府摠制李承幹庶男三長延皆幼永義興侍衛司大護軍府使男汀戶曹正郞予惟議政公道德文章之美名位勳業之隆無有比擬固嘗意其必有發之者久矣鳴呼晉陽公之積善成德宜享其報矣而不克有於其躬者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也歟古人有言爲善無不報予於晉陽公而徵之矣其流澤之久餘慶之永又可旣耶鳴呼休哉銘曰有流斯長維蓄其源有枝斯茂維固其根懿哉河氏實維德門卓彼左司克有殊勳乃厚厥積以啓後昆振振晉陽維德是勤厚倫息訟人服其義移家避寇人服其智惠于二州民慕怙恃義智且惠顯融是宜歛而家居竟莫以施天錫爾類乃生英賢相我聖主位極朝聯從容廊廟庶績維隆勳德之魁斯文之宗王曰政丞實予同德定社佐命懋乃丕績追爵三世並峻其秩旣勳而階領府維崇錫之妣爵辰國是封不顯潛德雖死猶生晉山峩峩晉水冷冷瞻彼坎麓維吉之叢維考維妣俱葬其中綿綿流慶曷其有終刻銘豊碑以告無期昭玆來裔孰不公思

永樂十四年三月日奉正大夫直藝文館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僉知承文院事朴熙中書幷篆

 

음기(陰記)

 

좌의정공(左議政公)은 서녀(庶女)가 셋이었는데 첫째는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둘째는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아직 어리다. 도총제(都摠制 : 河久)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김음(金音)의 따님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둔 아들이 하복생(河福生)인데 아직 어리다. 총제(摠制 : 李承幹)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이공전(李恭全)은 공정고부사(供正庫副使)이고 둘째는 이신전(李愼全)인데 사재직장(司宰直長)이고 그 다음은 각각 이성전(李誠全), 이순전(李純全), 이항전(李恒全)인데 모두 어리고 한 분의 따님도 아직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 河永)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둔 아들이 하계생(河繼生)인데 아직 어리고 따님도 아직 어리다.

 

곡산부사(谷山府使 : 金秩)은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따님은 의영고부직장(義盈庫副直長) 도이공(都以恭)에게 시집을 갔고 한 따님은 아직 어리다. 사직(司直 : 張希傑)의 아들은 장미(張美)인데 어리고 두 딸도 아직 어리다. 정랑(正郞 : 柳汀)은 중랑장(中郞將) 김태준(金台俊)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둔 아들이 류혜생(柳惠生)인데 미성(未成)이고 두 따님을 두었는데 큰 딸은 강여위(姜汝爲)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 딸은 어리다. 용담현령(龍潭縣令) 정여해(鄭汝海)의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어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류효산(柳孝山)으로 미성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 하나도 아직 어리다. 증우정승공(贈右政丞公 : 河恃源)은 둘째 아드님이 종부령(宗簿令) 하윤구(河允丘)이고, 딸이 둘인데 첫째는 낭장(郞將) 장온(張蘊)에게, 둘째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수(李守)에게 시집을 갔다.

 

종부령(宗簿令 : 河允丘)의 아들은 검교한성윤(撿校漢城尹) 하유(河游)이다. 낭장(郞將 : 張蘊)의 아들은 검교한성소윤(撿校漢城少尹) 장익(張翼)이고 따님은 사복부정(司僕副正) 김남갑(金南甲)에게 시집을 갔다.

 

밀직(密直 : 李守)의 따님은 성주목사(星州牧使) 하유종(河有宗)에게 시집을 갔다. 한성윤(漢城尹 : 河游)은 아들이 넷인데 맏이는 한성소윤(漢城少尹) 하지혼(河之混)이고 그 다음은 울산군지사(蔚山郡知事) 하지돈(河之沌), 공조정랑(工曺正郞) 하지명(河之溟),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 하지행(河之涬)이다. 검교소윤(撿校少尹 : 張翼)은 아들이 셋인데 맏이는 학생(學生) 장경(張慶), 다음은 부사정(副司正) 장필(張弼), 그 다음은 미성이며 딸은 사정(司正) 손번(孫磻)에게 시집을 갔다. 부정(副正 : 金南甲)의 아들은 회인감무(懷仁監務) 김효우(金孝友)이다.

 

울산군지사(蔚山郡知事 : 河之沌)는 아들이 셋으로 맏이는 하징(河澄)인데 미성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셋인데 첫째는 장흥고주부(長興庫注簿) 성규(成揆)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조정랑(工曹正郞 : 河之溟)의 아들은 셋인데 큰 아들은 하충(河冲)으로 미성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두 딸도 아직 어리다.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 : 河之涬)는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학생(學生 : 張慶)은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부사정(副司正 : 張弼)은 아들이 둘인데 모두 어리고, 네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조전(趙全)에게, 다음은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 정환(鄭煥)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회인감무(懷仁監務 : 金孝友)는 한 아들을 두었는데 어리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학생(學生) 정하(鄭何)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사정(司正 : 孫磻)은 아들이 둘이고 딸이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증판사평공(贈判司平公 : 河湜)의 차남은 전객령(典客令)을 지내다가 퇴로한 하거원(河巨源)인데, 여섯 분의 아들을 두었다. 맏이는 청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이고 둘째는 낭장(郎將) 하지숙(河之淑)이며,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 하을부(河乙桴), 중랑장(中郞將) 하을순(河乙洵), 해령천호(海領千戶) 하을빈(河乙玭), 전구서승(典廐署丞) 하을정(河乙汀)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선주지사(善州知事) 박응(朴膺)에게, 그 다음은 봉상령(奉常令) 강로(姜璐)에게 시집을 갔다. 서자(庶子)는 산원(散員) 하을생(河乙生)이고 서녀(庶女)는 학생(學生) 강시중(姜時中)에게 시집을 갔다.

 

낭장(郎將 : 河之淑)의 아들은 별장(別將) 하렴(河濂)이며 딸은 셋인데 첫째는 합주지사(陜州知事) 최유강(崔有江)에게, 그 다음은 사재령(司宰令) 정신덕(鄭新德)에게 그 다음은 군위현감(軍威縣監) 정하손(鄭賀孫)에게 시집을 갔다.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 : 河乙桴)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개곡처사(介谷處士) 하취유(河就濡), 그 다음은 공조전서(工曺典書) 하취동(河就東), 상호군(上護軍) 하승해(河承海), 부사직(副司直) 하승호(河承浩)이다. 중랑장(中郞將 : 河乙洵)의 아들은 사정(司正) 하굉(河浤)이며 따님은 학생(學生) 이지(李芝)에게 시집을 갔다.

 

해령천호(海領千戶 : 河乙玭)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의정부녹사(議政府錄事) 하사호(河斯浩)이며 그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셋이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강원립(姜元立)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전구서승(典廐署丞 : 河乙汀)은 한 아들과 네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주지사(善州知事 : 朴膺)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박보석(朴輔石), 둘째는 박필석(朴弼石)인데 모두 미성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성균관주부(成均注簿) 하결(河潔)에게 시집을 갔고 그 다음은 미성이다. 봉상령(奉常令 : 姜璐)의 아들은 사정(司正) 강안(姜晏)이다. 별장(別將 : 河濂)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학생(學生) 하축(河蓄)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학생(學生) 황유(黃瑜)에게 시집을 갔다. 합주지사(陜州知事 : 崔有江)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호군(護軍) 최수생(崔首生)이고 차남은 의령현감(宜寧縣監) 최중성(崔仲成)이며 딸은 생원(生員) 황근(黃瑾)에게 시집을 갔다.

 

사재령(司宰令 : 鄭新德)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사직(司直) 정중산(鄭仲山)이며 나머지는 미성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감무(監務) 모간(牟侃)에게, 다음은 의정부녹사(議政府錄事) 주봉의(周鳳儀)에게 시집을 갔다. 군위현감(軍威縣監 : 鄭賀孫)은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은 정조(鄭調)이고 다음은 정장(鄭獎)인데 모두 미성이고 두 딸은 모두 어리다. 개곡처사(介谷處士 : 河就濡)의 두 아들 중 맏이는 학생(學生) 하함(河涵)이고 다음은 미성이며, 한 명의 딸은 어리다. 공조전서(工曺典書 : 河就東)의 아들은 부사정(副司正) 하제(河堤)이며 세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배유문(裵有文)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상호군(上護軍 : 河承海)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하경복(河敬復)이고 둘째는 칠원현감(漆原縣監) 하경리(河敬履)이다. 사정(司正 : 河浤)의 아들은 다섯인데 맏이는 학생(學生) 하응(河凝)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좌의정공이 희중(熙中)에게, “근원은 같아도 분파(分派)되면 언젠가는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된다고 옛사람들이 슬퍼했던 것을 깊이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미 선고(先考)와 그 자손을 빠뜨림 없이 썼는데, 게다가 같은 할아버지와 같은 증조부를 둔 형제와 자손을 기꺼이 함께 기록케 한 것은 이것을 후손들에게 보여서 서로 잊지 말게 하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비문에 이어서 이것을 비의 뒷면에 썼다. 같은 해 9월 갑신(甲申)에 박희중(朴熙中) 삼가 적다.

 

左議政公庶女三長適谷山府使金秩次適中軍司直張希傑次幼都摠制再娶司憲監察金音女生男福生幼摠制男五長恭全供正庫副使次愼全司宰直長次誠全純全恒全皆幼女一幼大護軍娶門下侍中李公諱成林庶女生男繼生幼女一幼谷山生女二長適義盈庫副直長都以恭 一幼司直生男美幼女二皆幼正郞娶中郞將金台俊女生男惠生弱女二長適學生姜汝爲一幼再娶龍潭縣令鄭汝海女生男三長孝山弱餘幼女一幼贈右政丞公次男宗簿令諱允丘女二長適郞將張蘊次適密直副使李守宗簿男撿校漢城尹游郞將男撿校漢城少尹翼女適司僕副正金南甲密直女適星州牧使河有宗漢城男四長漢城少尹之混次知蔚山郡事之沌工曺正郞之溟 豊儲倉注簿之涬撿校少尹男三長學生慶次副司正弼次弱女適司正孫磻副正男懷仁監務孝友蔚山男三長澄弱 餘幼女三長適長興庫注簿成揆餘幼正郞男三長冲弱餘幼女二幼注簿男一女二皆幼學生男二皆弱女一幼副司正男二皆幼女四長適學生趙全次適豊儲倉注簿鄭煥 餘幼懷仁男一幼女二長適學生鄭何一幼司正男二女一皆幼贈判司平公次男典客令致仕諱巨源男六長菁川君諱乙沚次郎將之淑判軍器監事乙桴中郞將乙洵海領千戶乙玭典廐署丞乙汀女二長適知善州事朴膺次適奉常令姜璐庶男散員乙生庶女適學生姜時中郎將男別將濂女三長適知陜州事崔有江次適司宰令鄭新德次適軍威縣監鄭賀孫判軍器男四長介谷處士就濡次工曺典書就東上護軍承海副司直承浩中郞男司正浤女適學生李之千戶男四長議政府錄事斯浩餘幼女三長適學生姜元立餘幼廐丞男一女四皆幼善州男二長輔石次弼石皆弱女二長適成均注簿河潔次弱奉常男司正晏別將男四長學生蓄餘幼女適學生黃瑜陜州男二長護軍首生次宜寧縣監仲成女適生員黃瑾司宰男三長司直仲山餘弱女二長適監務牟侃 次適議政府錄事周鳳儀軍威男二長調次獎皆弱女二皆幼介谷男二長學生涵次弱女一幼典書男副司正堤女三長適學生裵有文餘幼上護軍男二長左軍同知摠制敬復次漆原縣監敬履司正男五長學生凝餘幼左議政公謂熙中曰同源分派遂成路人古人所悲可不深以爲感哉子旣書先考子孫無遺矣同祖同曾祖兄弟子孫勿憚幷書以示來裔使之不相忘也於是續書之

是年九月甲申  朴熙中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