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세응(河世應) : 1671년(顯宗 12) ~ 1727년(英祖 3)

 

자는 응서(應瑞)요, 호는 지명당(知命堂)이다. 송정공 수일(受一)의 현손이고 찬(瓚)의 증손이며 자호(自灝)의 손자요 태헌(台軒) 무(楙)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지조와 절개가 남달라 항상 나라를 걱정하였고, 가학(家學 : 남명학)을 착실히 계승하여 실천하였기에 주위에서 “송정 선생이 다시 환생한 것 같다”고 하였다. 숙종 기묘(1699년) 29세 때 생원(生員)과에 합격하였으나 조금도 영화로 여기지 않았으며, 당쟁의 참화가 가장 극심했던 숙종의 시대를 살면서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였다. 낙천지명설(樂天知命說)을 지어 “일찍이 공자는 나이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내 나이 50세를 넘겼으니 나름대로 천명(天命)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대저 하늘로부터 받은 목숨, 고락(苦樂), 부귀빈천(富貴貧賤), 이해(利害), 영욕(榮辱)은 모두 명(命)이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를 알고 이를 즐기면서 산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여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으로 조정이 소란하자 공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고 윤리가 무너진 때에 선비로서 어찌 치솟는 의기를 억누를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희빈 장 씨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리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 때 상소의 초고를 읽은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극구 말리면서 “그대의 의리와 기개는 진실로 장하나 앞장서서 상소하다 죽은 조중우(趙重遇, ? ~1721)의 전철을 밟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이 판국에 함정을 보고 스스로 빠지는 것은 군자가 행할 일이 아니다”하면서 간곡하게 충고하므로 결국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인 청천 신유한, 창사 손명래 등과도 왕래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하였다. 연산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진주 선비 지족당 조지서를 모신 신당사(新塘祠)의 편액을 조정에 청하였고, 남명 선생의 제자 중 어진 선비 여섯 분을 대각서원에 모시는 일도 주관하였다. 각재와 송정을 거쳐 가학으로 전해진 남명학의 전통은 옥종 안계의 겸재 하홍도에게 이어졌고 겸재의 조카 설창 하철을 거쳐 공이 고스란히 이어 받아 아들 태와 하필청(1701년~1758년)에게 전수하였다. 또한 공은 식산 이만부(1664~1732), 남계 신명구(1666~1742) 등 경상좌도 지역의 남인 학자들과 학문적 친분을 쌓으면서 퇴계학에도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싹실가(家)가 퇴계학을 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계 신명구는 인동(仁同)에 거주하던 선비로 1716년 이래 덕산에 10년간 우거하면서 대각서원 원장과 덕천서원 원장을 맡고 있을 때 싹실가(家)의 지명당을 비롯하여 겸재 가(家)의 양정재 하덕망 한계 하대명 부자(父子), 괴와 하대관 등과 교유하여 하씨 가(家)와 퇴계학맥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다.) 공은 1720년 나이 50세에 상주의 선비 식산 이만부를 만나러 가서 식산을 진주로 오게 하였는데, 식산 또한 6년간 덕천서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경상우도 지역의 선비들을 퇴계학맥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은 특히 송정공의 학문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송정집』 간행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는데, 특히 일가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공이 조직한 의계(義契 : 송정공 후손 계회) 또한 『송정집』 간행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공의 노력이 모태가 되어 공이 떠난 후 18세기 말에 『송정집』이 간행 될 수 있었다. 1719년 기해보(己亥譜) 편찬에 참여하였고, 지역에서 많은 유림의 일을 주관하기도 하였으니, 정충단을 창렬사로 승격시켜 위패의 순서를 바로잡고 의식을 정하기도 하였다.

 

배위는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재(梓)의 따님과 진주강씨(晉州姜氏)로 태제(泰齊)의 따님, 그리고 광주이씨(廣州李氏)로 만징(曼徵)의 따님이며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와(台窩) 필청(必淸), 극청(克淸), 통덕랑 학청(學淸), 효청(效淸)이다. 종후손(從後孫) 진현(晉賢) 찬 행장, 박태무(朴泰茂) 찬 묘지(墓誌), 성환혁(成煥赫) 찬 갈명(碣銘)이 있고 문집 지명당집(知命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