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진현(河晉賢) : 1776 (英祖 52) ~ 1846 (憲宗 12)

 

자(字)는 사중(師仲)이요, 호(號)는 용와(容窩)이다. 송정공(松亭公) 8세손이요 석계(石溪) 세희(世熙)의 현손이며 함와공(涵窩公) 이태(以泰)의 장자(長子)이다.

 

태와공(휘 必淸)의 제자인 남계 이갑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동당(東堂 : 식년시 또는 증광시)에 가고자 서울의 과시(科試)에 달려갔더니 당로자(堂路者)가 뇌물을 요구하므로 “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식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한 후 즉시 서찰로 집에 품고(稟告)하였다. 함와공이 글로 옮겨 이르기를 “선비가 벼슬을 하려는 것은 본래 임금을 섬기려는 것이거늘 지금 비로소 벼슬을 하고자 하면서 임금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냐.”하면서 매우 꾸짖었더니 공은 명을 들은 즉일로 내려와서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후 「폐거음(廢擧吟)」이라는 글을 통해 “내가 부친의 명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드디어 과거의 뜻을 접고 효도와 우애로서 집안을 편안하게 하고 시서(詩書)를 배우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었다.

 

공은 「시랑공유사후찬언(侍郞公遺事後贊言)」 「호정선생유집발(浩亭先生遺集跋)」 「환성재선생문집발(喚醒齋先生文集跋)」 「내복재선생문집보유발(來復齋先生文集補遺跋)」 「지명당공유사(知命堂公遺事)」 등의 글을 남겨 선대(先代)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으며, 「차록변무(車錄辨誣)」라는 글을 써서 호정(浩亭) 선생을 폄훼(貶毁)한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의 내용이 위서(僞書)임을 조목조목 밝혔다. 당시의 대유학자인 입재 정종로, 정재 유치명 등과 교유했으며 인근의 남고 이지용, 월촌 하달홍, 오연 김면운 등과도 질정(質正)을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 만년에는 사산초당(士山草堂)을 짓고 수양의 장소로 삼아 학문에만 힘을 크게 기울여 일방(一方)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배위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우익(又益)의 따님으로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운(鼎運), 복운(復運), 경운(慶運)인데, 경운(慶運)은 지명당(知命堂) 세응(世應)의 현손인 필용(弼龍)의 후(后)로 출계(出系)했다.

포산(苞山) 곽종석(郭鍾錫)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고, 문집 용와집(容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