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헌진(河憲鎭) : 1859년(哲宗 10) ~ 1921년

 

자는 맹여(孟汝)요 호는 극재(克齋)이다. 지명당 세응(世應)의 7대손이고, 부용담 필용(弼龍)의 증손이며 동료 재문(載文)의 계자(繼子)이다. 생정(生庭)으로는 함와공의 현손이고 용와공의 증손이며 유담공 재도(載圖)의 둘째 아들이다. 사곡리 구태마을에 살다가 어려서 학문을 위해 부친 동료공을 따라 옥종 안계로 이주하였다. 안계의 모한재(慕寒齋)에서 강학을 주도하던 월촌 하달홍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가학(家學)을 이었다. 18세 때 다시 고향 사곡으로 돌아온 후 한말 영남 유림의 종장인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부친 동료공이 지명당공과 태와공 양(兩) 선조의 문집을 발간하려고 초고를 모아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공이 유업(遺業)을 이어 두 분 선조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남명연원가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이어 내려온 남명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남명 선생의 신명사도(神命舍圖)를 손수 그려 걸어두었고 남명의 학문 종지인 ‘경의(敬義)’ 2자(字) 역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집안 동생 회봉 겸진(謙鎭)과는 허물없이 지내면서 낙수재 등에서 학문을 토론하였고, 만성 박치복·후산 허유·대계 이승희 등 당대의 영남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당시 영남학맥의 주류인 퇴계학을 익히는 데도 노력하였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문밖출입을 삼가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고 1919년 61세 때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탄원서를 가지고 심산 김창숙이 수곡을 방문했을 때 회봉 하겸진·백촌 하봉수·여인헌 하재화 등 당시 학문이 뛰어난 문중의 선비들이 서명을 하였다. 당시 공은 아들 영두(永斗)에게 공의 이름으로 서명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부친의 연로(年老)함을 걱정한 아들은 이를 행할 수 없었다. 후에 일본 순사들이 수곡으로 서명자를 체포하려 왔을 때 공은 ‘올 것이 왔구나.’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는데 순사들이 공은 체포하지 않았다. 공이 순사에게 “왜 나는 잡아가지 않느냐”하고 물었더니 순사가 “당신은 서명자 명단에 없다”고 하였다. 공이 일의 전말을 알고 난 후 자식을 호되게 질타하고 대면조차 하지 않으며 이후로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공의 아들이 부친을 염려하여 서명을 하지 않은 것은 천륜(天倫)이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배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영돈녕(令敦寧) 병구(秉耈)의 따님이며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영두(泳斗)이다. 족질(族姪) 영태(泳台) 찬 행장,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찬 묘지(墓誌), 족제(族弟)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 찬(撰) 묘갈명이 있고 문집 극재집(克齋集)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