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영태(河泳台)  1875년(高宗 12) ~ 1936년

 

초휘(初諱)는 영조(永朝), 자는 여해(汝海)요, 호는 관료(寬寮)이다. 함와공(涵窩公) 이태(以泰)의 차자(次子)인 고재(顧齋) 경현(景賢)의 현손이며 재희(載羲)의 손자요 두진(斗鎭)의 아들이다. 부친은 본래 송정가(松亭家)의 종손인 남파공(南坡公, 諱 載厚)의 둘째 아들인데 고재 경현의 증손으로 계후(繼後)되었다. 삼종숙(三從叔) 회봉(晦峯)을 사사(師事)하였고, 면우 곽종석(俛宇郭鍾錫)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아 당시의 많은 사백(詞伯)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5·6세 때부터 언행이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15세 때부터 삼종숙인 회봉 선생에게서 학문을 익혔는데 회봉 선생은 면우 곽종석의 문인으로 당시 강우지역의 대표적 학자였다. 공은 회봉 선생의 문하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구강학사, 낙수암, 고산정 등지에서 『사서육경』, 『역대사전(歷代史傳)』 등의 책을 읽으면서 문리를 터득해 나갔다. 공은 회봉 선생과는 5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정성을 다해 회봉 선생을 모셨고 학문을 익히는 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구강학사에 모인 많은 선비들이 한결같이 “관료의 자질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며 감탄을 하였다. 회봉 선생에게 학문을 익히면서도 거창 다전으로 면우 곽종석 선생을 찾아가 질정을 하며 학문의 요결을 들었는데 이 때 면우 선생은 “그대는 우리 유림에서 자질이 뛰어난 젊은 선비다. 그대의 집안에 어진 스승이 많으니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거창을 자주 왕래하면서 면우 선생에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16년 성주의 학자이자 애국지사였던 대계 이승희(한주 이진상의 아들)가 중국 봉천에서 세상을 떠나 고향인 성주에서 장례를 치를 때 제문을 지어 수백 리를 달려가 문상(問喪)하였다. 대계 이승희는 평소 공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고 공 또한 대계의 절개를 추중하여 직접 조문을 한 것이었다. 곽 면우 선생이 ‘파리장서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자, 단성의 이동서당(尼東書堂) 건립을 비롯하여 『면우집』 간행의 일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공은 평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추구하지 않았으며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초옥에 살면서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후배들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할 때는 애써 거절하면서도 모르는 것을 물어오면 명쾌하게 해답을 구해 주었다. 자질들에게는 ‘誠’자를 강조했는데 자신을 수양하는 것과 만물을 이루는 요체가 ‘誠’자 하나에 있다 하였고 성(誠)이 없으면 모두 거짓이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조계강 가에 만수당(晩修堂)을 지어 그 곳에서 회봉 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토론하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詩)를 읊조렸다. 만수당은 수곡 창촌리 조계마을 뒤편에 퇴락한 채로 있다. 1936년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나자 회봉 선생이 공의 묘갈명에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평생 참된 선비의 길을 걸었다.”고 하며 공의 삶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배위는 진주정씨(晉州鄭氏) 진사(進士) 필우(必佑)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회근(晦根), 식근(湜根)이고 사위는 청주인 한욱동(韓昱東)과 진주인 강백현(姜伯鉉)이다.

삼종숙(三從叔)인 회봉(晦峯) 겸진(謙鎭) 찬(撰) 갈명(碣銘)과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고, 문집 관료집(寬寮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