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명(河   洺)  1630년(仁祖 8) ~ 1677년(肅宗 3)

 

자는 차해(次海)요, 창주공(滄洲公) 증(憕)의 손자며 달도(達道)의 아들이다. 9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일찍부터 가학인 남명의 학풍을 이었고, 당시 남명학파의 대표인 겸재 하홍도(河弘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현종 1년(1660년)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거업(擧業)을 폐하고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처형되자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문제로 겸재의 문인 하자혼, 이집 등과 심하게 마찰하였고, 그 후 겸재 계열과는 결별하고 우암(尤庵)과 동춘당(同春堂)의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지만 1666년 스승 겸재가 죽었을 때 만사와 제문을 지어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우·춘(尤春) 양현께서 공을 애중히 여기어 선학(仙鶴)으로 지목하였고 『남명문집』의 일 때문에 최(崔)·장(張) 무리에게 무함되었을 때도 양현께서 그 무망함을 알고 구명에 힘써 마침내 귀정케 되었다. 이후 송규렴(宋奎濂) 이상일(李尙逸) 송규창(宋奎昌) 송규상(宋奎祥) 등 노론학파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종숙 용강공과 함께 우암 선생에게 『남명집』의 이정(釐正) 문제를 상의하였고 또 남명의 신도비명을 청하여 받아왔다. 이런 일로 공의 자손들은 진주지역 노론세력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한말에는 송환기(宋煥箕) 최익현(崔益鉉) 전우(田愚) 등 기호학파 명사들의 문하를 출입하게 되었다.

 

배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승의랑(承議郞) 탁(琢)의 따님과 전주이씨(全州李氏)로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윤우(潤宇), 윤호(潤昊)이고 사위는 안동인(安東人) 권의형(權義亨), 최경흡(崔慶洽), 문두성(文斗星), 송지전(宋之烇)이다.

「생원공실기(生員公實記)」가 간행되었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찬 행장(行狀)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찬 묘표(墓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