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형(河   浻)  1649년(仁祖 27) ~ 1731년(英祖 7)

 

공의 자(字)는 경해(景海)이다. 단지공(丹池公) 진사(進士) 협(悏)의 손자이며 진사(進士) 달한(達漢)의 아드님이다. 공은 자질이 순인(純仁)하고 기품이 아름다우며 덕성은 세속의 모범이 되어 명성이 오래도록 선비의 자리에서 무거웠으니 효우(孝友)는 가정의 가르침이요 시(詩)와 예(禮)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명성이었다. 어릴 때부터 빼어나 종백형(從伯兄) 만향당(晩香堂)과 함께 오곡정사(梧谷精舍)에서 수학하여 고비(皐比 : 講學의 자리)에서 이름이 높아 1726년 덕천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임포(林逋)의 ‘서호(西湖)의 노닒’을 사모하여 한가롭게 소요(逍遙)하였고, 다섯 아들의 봉양이 지극하여 강녕함을 이루었다. 공이 인(仁)을 행하고 덕을 쌓아 오복의 첫째인 장수(長壽)를 누렸는데 무신(戊申, 영조4)년에 암행어사가 이를 조정에 알려 그해에 공에게 노인을 우대하는 특별한 은전으로 통정대부 용양위(龍驤衛) 호군(정4품)의 벼슬을 내렸다.

 

단지(丹池) 종가(宗家)에 대(代)가 끊어지게 되자 장자(長子)를 보내어 승가(承家)토록 하였고, 임란 후에 창주공 증(憕)이 진양하씨 족보를 수습하여 창보(刱譜)하였으나 인판(印版)하지 못한 것을 공이 제족(諸族)의 힘을 모아 1719년 기해(己亥)년에 비로소 인판(印版)을 하였으니 이것이 곧 진양하씨 최초의 목판본 족보인 『기해보』이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시헌(時憲)의 따님으로 무육(無育)이고 숙부인(淑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성흠(聖欽)의 따님으로 5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윤관(潤寬), 윤수(潤洙), 윤조(潤朝), 윤장(潤章), 윤원(潤遠)인데 장자 윤관은 종백부(從伯父) 현(灦) 후(后)로 출계(出系)했다.

출후손(出后孫) 정근(貞根)이 지은 행장(行狀)과 족후손(族后孫) 용환(龍煥)이 지은 갈명(碣銘), 그리고 유집(遺集) 「호군공문집(護軍公文集)」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