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오방재

 

 

오방전경

 

오방재(梧坊齋)는 처음 문충공 하륜(河崙) 선생의 우모소(寓慕所)로서 왕명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8일에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호정(浩亭) 륜(崙) 선생 양위분과 선생의 할아버지 진강부원군 문정공 시원(恃源)과 배위 진양정씨, 선생의 아버지 진양부원군 윤린(允潾)과 배위 진양강씨의 시제(時祭)를 올린다.

 

선대(先代)에서 남긴 중수기(重修記)에 의하면, 호정(浩亭) 선생께서 정사(定社)와 좌명(佐命)의 공훈(功勳)이 있어 별세(別世)하자 왕명으로 오방(梧坊)에 예장(禮葬)하고, 공전(公田) 백결(百結)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초상(肖像)을 모시고 후생들이 추모하는 장소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세(三世) 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백결(百結)의 조세도 모두 없어졌으며, 여러 번의 전화(戰禍)를 입어 영당(影堂)도 모두 빈터만 남아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지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이 외예(外裔)로서 1580년에 중건하였으나 전란(戰亂)에 소실(燒失)되고, 1684년 즈음에 신암 현손 군수공(李楷)이 선지(先志)를 이어 중건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729년 인재공(忍齋公) 휘 윤관(潤寬)과 군수공(郡守公) 아들 이만조(李滿肇)가 중건하여 1735년에 기와를 얹어 중수한 것을 1764년에 죽와공(竹窩公) 휘 일호(一浩)와 군수공 손자 이광태(李光泰)가 응석사 성대암 재목을 구입하여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재사(齋舍)를 지었다. 규모가 웅장하고 승도(僧徒) 30여 명이 있어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제사를 받드는 절차가 위의(威儀)가 있었으므로 대신(大臣)의 분암(墳菴)으로 손색(遜色)이 없었다고 한다. 1799년 정조(正祖) 유제(諭祭) 때 여러 고을 관원(官員)과 유생(儒生), 또 구경 온 수백 명을 다 수용하여 옥외(屋外) 풀밭에 앉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흉년이 들고 전답(田畓)이 메말라 묘소를 지키던 승도(僧徒)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니 집이 낡아 훼손되었다. 1824년에 종원들이 의논하여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 응현(膺賢)이 공사를 감독하고 정범(鼎範), 봉운(鳳運)이 비용을 조달하고, 진철(鎭喆)과 경현(景賢)이 재임(齋任)으로 도와 1825년 3월 20일에 중수하였으나 형편상 규모는 예전의 절반으로 줄었다. 그 뒤 1922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대종회 회장 순봉(舜鳳), 부회장 만구(萬九), 상대(相大) 제씨(諸氏)의 노력으로 2008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35호로 지정받아 2010년 7월에 문화재 보수 지원금으로 중수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죽와공(竹窩公) 일호(一浩) 찬(撰)

국가(國家)에서 왕조(王朝)가 바뀌는 시기에는 일에 지극한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생각건대, 우리 방선조(旁先祖) 호정(浩亭) 선생은 회천(回天)의 공적과 천명(天命)을 돕고 사직을 안정시켜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되셨고 세 조정에서 철권(鐵券)을 받으셨다. 선생의 시(詩)에서 ‘은혜가 하늘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별세하자 왕명으로 오방(梧坊)에 예장(禮葬)하였고, 백결(百結)의 공전(公田)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초상을 모셔서 후생들이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화에 모두 화재를 입고 말았으니 그 어찌 애석함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이 재사(齋舍)는 곧 묘소에 제사를 올릴 때 재명(齊明)하는 곳인데 옛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공이 창건하였다.

 

뒤에 화재를 당하여 나의 할아버지 인재부군(忍齋府君)과 신암공(新庵公) 후손인 군수공(郡守公)이 매우 힘들여 중수(重修)하였던 것이 지금 80여 년이 지났다. 비바람에 시달려서 기와와 주춧돌이 갈라지고 집채가 무너져, 시골의 늙은이들도 지나가다가 보고 머뭇거리면서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니, 우리 방후손(傍後孫)들은 더욱 중수(重修)하는 공사를 그만 둘 수 없었다. 당시 변변찮은 나와 이광태(李光泰) 군이 함께 이 재임(齋任)을 맡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종족(宗族)들이 이 일을 두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일은 크고 힘은 약하니 참으로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근심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헤아려보니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응석사(凝石寺)의 한 집채를 사들여 수선을 꾀하니 부근의 촌옹(村翁)들이 각자 그 아들과 조카들을 거느리고 즐겁게 달려와서 일했다. 광태(光泰)군의 모든 종족과 장우규(張友奎) 군은 선생의 외손들로서 또한 성의와 힘을 다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었으니 이에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오호라! 선생의 명성은 어린아이들도 외우고 선생의 공적은 역사에 전해지고 있으니, 이는 백세(百世) 후에도 선생은 길이 잊히지 않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어찌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고 사실을 부풀려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데 스스로 빠지겠는가?

 

낙성(落成)하는 날, 모든 분들이 부탁을 하여 대략 위와 같이 전말(顚末)을 기록하면서, 또한 선생의 공명과 사업으로써 우리 집안의 후손들이 무궁히 발전하기를 바란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두 번째 맞은 갑신(甲申, 1764년)에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죽모재공(竹慕齋公) 진탁(鎭卓) 찬(撰)

오방재(梧坊齋)는 곧 나의 방선조(傍先祖) 문충공 호정(浩亭) 선생 묘소의 아래에 있는 재명(齊明)하는 재실(齋室)이다. 재사(齋舍)의 흥폐(興廢)와 일의 전말(顚末)은 나의 선고(先考) 죽와부군(竹窩府君)의 중수기(重修記)에서 분명하게 살필 수 있으므로 중복할 필요가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언급하여 뒷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다.

 

오호라! 선생은 크고 높은 덕망과 훌륭하고 큰 업적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원훈(元勳)이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하늘이 선생에게 어찌 덕을 내리는 데는 후했으나 그 보답은 하지 않은 것인가!

 

선부군께서 이 재사를 중수하신 것이 이미 60여 년이 흘러서,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와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되돌아보면, 변변찮은 나의 나이가 지금 여든이 넘어 아침저녁으로 저승사자를 기다리며 세상일에는 뜻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재사가 영원히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족(宗族)과 이군(李君) 아무개와 정성과 힘을 다하여 마침내 긍구(肯搆)의 바람을 이룰 수 있었고, 이에 나의 책임을 대략 채울 수 있게 된 듯하다. 후세들이 우리들의 이런 마음을 잇는 자도, 우리들이 우리 선배들의 마음을 잇는 것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로다. 진실로 이런 마음을 보존하면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는 것도 어려움 없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인데, 더구나 이 재사를 수리하는 일쯤이야! 만약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평천장(平泉莊)의 수석(壽石)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니, 더구나 이 재사를 수호하는 일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아! 이 재사의 흥폐는 오직 이러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길이 효도하고 사모하나니, 효도하고 사모함이 본보기가 된다.”라고 하였고,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지라,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네.”하였으니, 모든 우리 성(姓)을 지닌 뒷사람들이 어찌 이것으로 마음을 삼지 않겠는가? 드디어 마음속에서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지었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갑신(甲申, 1824년)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고재공(顧齋公) 경현(景賢) 찬(撰)

오방재(梧坊齋)는 우리 진강군(晉康君),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3대의 묘소를 수호하는 곳으로 이 재사를 세운 것은 오래 되었다. 처음에 상서(尙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공이 외후손으로 그 일을 주관하여 띠로 지붕을 얹었고, 또 뒤에 신암공의 후손 군수공(郡守公)이 기와로 바꾸어 얹은 것은 영조(英祖) 을묘(乙卯, 1735년)의 일이었다. 응석사(凝石寺) 성대암(聖坮菴) 재목을 거두어 와서 같은 규모로 지었다. 그 제도가 매우 크고 훌륭하여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가 매우 화려하고 풍부하여, 시제(時祭)를 드릴 때에 본손, 방손, 외손들이 멀고 가깝고를 가리지 않고 미리 모여 재명(齊明)하였으니, 재사가 크고 훌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지난 정조(正祖) 기미(己未, 1799)년에 특별히 동부승지 조홍진(趙弘鎭)을 보내어 문충공 유제(諭祭)를 지내게 하였다. 여러 고을의 군수와 목사들과 사방의 유생들이 예식을 돕고 구경하는 자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풀밭에 앉고 바깥에서 묵어야 하는 걱정이 없었으니, 생각해 보면 옛 어른들이 마련한 재사의 규모가 어찌 성대하지 않았겠는가?

 

이후에 간혹 흉년이 들면 논밭이 메마르고 줄어들어 묘소를 지키던 승도(僧徒)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기둥이 썩어서 부러지고 기와가 깨어져 비가 새어서, 비바람과 쥐와 참새가 침노하는 근심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늘 제사를 올릴 때에 모두 안타깝게 여기고 탄식하였다.

갑신(甲申, 1824)년 초겨울 그믐께에 여러 종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 재사를 버려둘 수 있겠는가? 첫째는 선조를 추모하는 것이고, 둘째는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것에 관계되는 것이 얕지 않으므로, 이 재사를 보수하는 것을 미룰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재물이 옛날만 못한데 집의 규모는 저처럼 크고 넓으니, 규모를 작게 만들고 그 비용을 줄여서 상황에 맞게 꾸려나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각기 약간의 성력(誠力)을 내놓고, 익년 중춘(仲春)에 공사를 하기로 하였다. 초사흘에 터를 닦고 열사흘 만에 대들보를 올렸다. 종중(宗中)의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 씨와 아우 응현(膺賢)이 이 공사를 감독하고 정범(鼎範) 씨와 종질 봉운(鳳運)이 비용을 조달하였다. 나와 진철(鎭喆) 씨는 본래 재임(齋任)을 맡아서 앞뒤로 도왔다. 3월 20일에 공역을 마쳤다. 방과 마루와 부엌이 짜임새가 있어 어지럽지 않으나, 단지 그 규모가 옛날에 비해서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절약하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고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어서 보수할 때는 더욱 규모를 넓혀서 옛날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오늘의 허물을 덮을 수 있고 또한 선조의 자애로운 손자라고 할 만하리라.

 

적이나 이 일로 후세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한 번 쇠하고 한 번 성한 것은 운수의 이치이니, 또한 한 때 규모가 작았던 것을 불만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한마디 해 두고 싶은 것은, 이 재사의 용도는 본시 넉넉하지 않았으나 요행이 제사에 제철의 제수를 올리는 것 외에 남는 재물이 있으면 거두어들이지 말고, 이자를 놓아서 반드시 흩도록 하라. 옛사람들이 남는 것을 남겨두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뜻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이것이 곧 오늘 옛날의 규모를 깎아서 작게 만들게 된 까닭이다. 앞으로 전례(前例)를 옳다고 여기지 말고, 남은 재물을 거두어 기록하여 전임자가 맡고 있던 것을 계속 물려준다면, 뒷날 옛날의 규모를 회복하는 도리에 보탬이 될 것이다.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하여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마침내 이 과정을 기록한다.

    을유(1825)년 단양절에 후손 경현(景賢)이 삼가 짓다.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역헌공(軒公) 진달(鎭達) 찬(撰)

재실(齋室)은 문충공(文忠公) 묘소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생각건대, 우리 문충공(文忠公)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공로가 있었고, 은덕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조정에서 예(禮)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부원군(府院君) 에 봉하고 공전(公田)에 세금을 면제한 것은 곧 묘도를 수호하는 법도와 세사(歲事)를 올리는 의식을 마땅히 지극하게 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백결(百結)의 조세도 모두 없어졌고, 여러 번의 전화(戰禍)를 입어 영당(影堂)도 모두 빈터만 남아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진주에 옛날 판서 신암(新庵) 이공(李公)이 선생의 외 6세손으로서 재사를 세우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를 올렸던 것이 오래되었다. 임진왜란에 재사가 버려지고 제전의 문건을 잃고 분묘를 돌보지 않았던 것이 거의 백 년이나 되었으니 나무꾼과 목동들도 서글퍼하고 길을 가던 나그네도 탄식하게 되었다.

 

신암공(新庵公)의 현손(玄孫) 군수공(郡守公)이 선대의 뜻을 능히 이어 힘을 다해 중건하였으나, 그 뒤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재사에 또 불이 났고, 기유(己酉)년에 군수공의 아들인 태동(台洞) 이장(李丈)이 나의 삼종(三從) 증조부 인재공(忍齋公) 및 두세 분이 뜻을 같이 하여 다시 중건을 하게 되었다. 임란(壬亂) 전후로 띠를 얹기도 하고 기와를 이기도 하였으며, 재사가 버려지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갑신(甲申)년 인재공의 손자인 죽와공(竹窩公)과 이장(李丈)의 아드님인 광태(光泰) 씨가 서로 함께 일을 추진하였다. 응석사(凝石寺) 암자를 사들여 그 규모를 확장하였으니, 본채와 아래채, 마루와 다락과 횡각(橫閣)과 뒷방이 매우 크고 웅장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때때로 와서 글을 읽었는데, 온갖 조치가 매우 온전하고 성대하였다. 승도(僧徒) 30여 명이 그 안에 가득하여, 온갖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제사를 드리는 모든 절차가 매우 위의(威儀)가 있었으니 참으로 중대신(重大臣)의 분암(墳菴)이라고 할 만하였다.

 

이후 수십 년 사이에 승도들이 떠나고 홀로 집 한 채만 빈 골짜기에 서있게 되었으니 곧 폐치(廢置)될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우석(右釋)이라는 한 사내만 골짜기에 머물러 살면서 고직(庫直)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할 뿐이었다. 옛 시절을 회고하면, 참으로 한심하였고 버려진 방과 부서진 창문만 쓸데없이 넓고 컸을 뿐이었다. 그래서 갑신(甲申)년 가을에, 규모를 작게 만들 것을 의논하였고 종회(宗會)에서 파별(派別)로 안배하여 모을 자금을 나누어 각기 맡겼다. 거둔 것을 모두 합치니 300금이 조성되었다.

 

유사(有司)는 나와 하대범(河大範), 하응현(河膺賢)이고, 하진철(河鎭喆), 하경현(河景賢)은 본시 재임(齋任)이었다.

 

을유(乙酉)년 정월에, 옛 재사를 허물고 새 재사를 세웠다. 옛 기초에 따르되 고쳐서 구조를 새롭게 하였으므로, 두 개의 큰 방과 중간에 마루 합쳐서 네 칸이다. 실로 각 서원의 강당(講堂)의 양식을 본받았다는 것에 그 뜻이 있다. 그러나 그 규모의 웅장함은 절반에 지나지 않으나 안정감이 있고 견고하니 백여 년은 지탱할 수 있으리라. 알 수는 없지만 백년 뒤에 다시 어떤 사람이 선대의 미덕(美德)을 계승할 때에는, 이러한 뜻을 어기지 말라. 공역을 마친 뒤에, 뒷날 이 재사에 오르는 자가 참고할 자료가 없게 될까 두려워서 그 전말(顚末)을 기록함으로써 보고 느끼는 데 대비하고자 할 따름이다.

시(詩)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생의 묘소 아래에서 제사 드리고 재계하는 집을,

선배들이 지어서 면밀하게 갖추어 놓았었네.

백결의 공전(公田)을 내린 은전이 오래되었고,

열 줄의 어제문(御製文)에 오래도록 감탄했네.

온갖 일을 겪으면서 승도(僧徒)들은 다 흩어졌고,

묘소를 우러러 보며 어르신들은 마음 아파했었네.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모아져 지금 다시 세우나,

이 후생은 어느 날에 다시 이곳을 느긋하게 배회할까?

 

위의 글은 선고 역헌공(櫟軒公)이 순조(純祖) 을유(乙酉, 1825년)에 지었는데, 43년이 지난 정묘(丁卯, 1867)년에 판각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벽에 걸었다. 불초자 극범(極範)이가 삼가 글씨를 썼다.

 

 

오방재 상량문(梧坊齋上梁文)

1922년 하영태(河泳台) 찬(撰)

엎드려 생각건대, 묘소를 우러러보면 서리와 이슬에 느껴지는 마음이 치미니, 이런 것은 후손들이라면 같은 마음이리라. 선조의 자취를 쫓아서 재사(齋舍)를 짓는데 정성을 다하니, 여러분들이 선조의 뜻을 잘 이어나가려는 마음을 속일 수 있겠는가? 신이 돕는 듯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재사를 완성하게 되었다.

 

공경히 생각건대, 이곳 오방의 봉역(封域)은 참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우리 선조 3세의 유택이다. 문정공(文貞公)께서 ‘쌓은 덕과 순수한 충정’은 선왕(先王)께서 내리신 절혜(絶惠)의 은전(恩典)을 넉넉히 입었구나! 진양군(晉陽君)께서 ‘조정에 협찬하고 의로움을 지킨 공적’은 고려의 역사에 실려 있는 표창하고 존숭하는 글에서 빛나구나! 더구나 우리 문충공(文忠公) 선생께서는 실로 우리나라의 이윤(伊尹)이었음에랴! 오랑캐 옷을 버리고 중화(中華)의 관복을 입게 하여 명(明)나라 사신 서질(徐質)을 탄복하게 하셨고, 이미 주춧돌을 놓았는데 경복궁의 좌향을 바꾸게 하시어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대성통곡하게 하셨다. 우리나라가 크게 다스려진 것은 선생의 힘을 입었고, 우리의 도(道)도 선생 때문에 크게 밝혀졌다. 어수선한 시대에 경륜을 발휘하여 새 나라를 이루고 임금을 세우는 일을 돕고, 술과 음식으로 즐겁게 잔치할 때에도 세상을 바꾸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공적이 있었다. “우(禹)가 구서(九敍)의 노래로, 고요(臯陶)가 갱재가(賡載歌)로 순(舜)임금을 권면했던 것처럼 보좌하였다”라고 기린 것은 태종(太宗)의 보묵(寶墨)에 찬란히 빛나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네”라고 한 것은 정조(正祖)의 유문(諭文)에 간곡히 표현되어 있다. 태묘(太廟)에서 함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임금과 신하가 일체라는 것을 징험할 수 있고, 선영(先塋)의 왼쪽에 합사(合祀)하는 재사를 세운 것은 천추(千秋)에 길이 추념하기 위해서이다.

 

즐겁구나! 이 언덕이 어찌 다만 도간(陶侃)의 우면지(牛眠地)에 지나지 않으랴. 지나가는 길손이 반드시 경의(敬儀)를 표하니, 동자(董子)의 하마릉(下馬陵)과 거의 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마음을 정결히 하려고 세운 재사가 날아갈듯 하고, 선조의 사업을 익힐 곳이 있게 되었으니 길이 후손들이 번성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상서공(尙書公)이 외후손(外後孫)으로서 처음에 초가집을 지었고, 군수공(郡守公)이 선대의 뜻을 따라 다시 기와를 얹었다. 이곳에서 놀고 이곳에서 쉬면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반드시 실천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여름 제사를 올리고 이곳에서 겨울 제사를 올리면서 향을 사르며 추념하면 신령(神靈)이 강림(降臨)하는 것을 느끼지 않겠는가?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도 쉬 놀라기 마련인데, 마룻대와 처마는 걱정이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위와 옆으로 비바람이 치는 것을 유생(儒生)들도 탄식하는데, 지붕과 담장을 멋대로 짐승들이 이빨로 갉고 뿔로 허무는 것을 보고서 어찌 후손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겠는가? 선배들이 재사를 세우는데 얼마나 들었었는지, 응당 오늘 의논하게 되었다. 거북점과 시초점(蓍草占)을 치니 점괘도 좋다고 하여, 성력(誠力)을 모으니 금방 불어났고 정성(定星)도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이르렀다.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마침내 크고도 높으며 잘 갖추어진 재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령(英靈)이 강림하시어 어렴풋이 계시는 것처럼 엄숙하게 흠향하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백 겹의 노비가 있어도 무더기로 집안에 들 수 있고, 한 줄기 시내가 옥을 울리듯 졸졸 흘러서 뜰을 돌아 흐르는 소리도 즐겁게 듣게 되었다. 선인들이 중수(重修)한 것에 가히 모자랄 게 없으니, 길이 뒷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될 것이로다. 일하던 연장을 잠시 놓고 노래를 이어서 불러 보세.

 

어기어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큰 고래가 물을 뿜는 동해가 한껏 보이네.

어째야 그 시절을 만회할 사람을 얻어서,

푸른 하늘에 떠오르는 밝은 해를 다시 맞이할까?

어기어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도를 어지럽히는 허턴 말은 늘 서쪽에서 오네.

아직 남기신 글에 진결(眞訣)이 있으니,

유학(儒學)을 일으킨 큰 뜻은 하늘처럼 높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뽕나무 무성한 고향은 비봉산 남쪽에 있네.

철권단서(鐵券丹書)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까?

벽오당(碧梧堂)은 오래되어도 큰 강은 푸르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북으로 들어 올리니,

긴 밤 슬픈 바람은 곧장 북쪽에서 불어오네.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훈 오백년에 우뚝한데,

무덤이 한 번 닫히면 뉜들 일어날 수 있으랴!

어기어차! 들보 위쪽을 들어 올리니,

푸르고 푸른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시며,

새벽 없는 밤이 기나길다고 마십시오.

천도(天都)에서도 첫 닭 울기를 기다린답니다.

어기어차! 들보 아래쪽을 들어내리니,

굽이굽이 샘물 흐르는 소리 베개 맡에 울리네.

여기에서 높은 곳을 착안하기 가장 좋은데,

냇물은 밤낮 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기둥과 서까래가 오래도록 안전하고 제주(祭酒)와 제수(祭需)가 더욱 정결하기를. 선조들께서 멀고 가까움의 차등이 없이 보시던 뜻을 체득하고 이곳에 와서 화목함을 닦으며, 자제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기르는 공부가 있게 하고 착실히 충효(忠孝)를 본받게 하시기를.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2010년 목림(牧林) 순봉(舜鳳) 찬(撰)

오방재(梧坊齋)는 참으로 위대(偉大)한 업적(業績)을 남기신 우리 선조 삼세(三世)의 묘소(墓所)에 제사(祭祀)를 드리고 재명(齊明)하는 곳으로 이 재사(齋舍)의 연원(淵源)이 오래되었다. 우리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께서는 순충적덕(純忠積德)으로 문정(文貞)이라는 절혜(節惠)의 은전(恩典)을 받으셨고,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의 수의협찬(守義協贊)한 공적(功績)은 국사(國史)에 빛난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호정(浩亭) 선생은 고명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화국(華國)의 큰 문장이셨고, 충신중후(忠信重厚)한 자질(資質)로 경세(經世)의 대유(大猷)셨다. 정사좌명(定社佐命)의 원훈(元勳)이 되셨고 삼 조정(三朝廷)의 고굉(股肱)으로 철권(鐵卷)을 받으셨다. 별세하자 왕명(王命)으로 이 오방묘역(梧坊墓域)에 예장(禮葬)하였고 백결(百結)의 공전(公田)을 하사(下賜)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셔서 후생들이 갱장(羹牆)의 장소로 삼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삼세(三世)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화재를 입어 황폐(荒廢)해졌다. 1580년 즈음에 선생의 외후손 좌참찬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공이 오방재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재사(齋舍)가 훼폐(毁廢)되었다. 1684년 즈음에 신암(新菴)의 현손 군수(郡守) 이해(李楷) 공이 다시 중건하였다. 얼마 뒤 소실되어 1729년에 방손(傍孫) 인제공(忍齋公)과 군수공(郡守公)의 아들 이만조(李滿肇) 공 등이 주축(主軸)이 되어 중건하였고 이어 1735년에 군수공의 후손들이 선대의 뜻에 따라 기와를 얹었다.1764년에 방손 죽와공(竹窩公)과 군수공의 손자 이광태(李光泰) 공이 뜻을 모아 중건하였고 1799년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이곳에서 유제(諭祭)하였다. 1825년에 진탁(鎭卓)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 응현(應賢) 정범(鼎範) 봉운(鳳運) 경현(景賢) 진철(鎭喆) 공과 여러 방손들이 용도에 맞게 재사(齋舍)의 규모(規模)를 반으로 줄여서 중건하였고, 1922년에 모든 방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종회 회장의 중책을 맡아 직무를 수행함에 대종(大宗)의 사당에 모든 종족(宗族)이 다모여 선조를 숭앙하고 종족 간 돈목을 도모함이 마땅한 일이니, 우선(于先) 이 재(齋)를 보수하는 것이 숙원이라고 생각하여 정부로 하여금 진입로(進入路)를 확장하도록 하였고, 2008년에 이 재사(齋舍)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35호로 지정받았다. 이어 문화재보수 국고지원금 5억 8천만 원으로 2010년 7월 보수공사를 시작하였다. 정전(正殿)은 썩은 연항(椽桁)을 바꾸고 기와를 갈고 벽면을 손질하니 반듯하고 날렵하다. 동행랑 서행랑을 헐고 신축하니 재숙(齋宿)하며 제수(祭需)를 마련하기에 적합(適合)하다. 층계(層階)와 석축을 쌓고 보도(步道)를 까니 행례(行禮)에 적합하다. 전기와 급수시설을 갖추니 거처하기에 편리하다. 이어서 담장을 마저 두르니 웅장하고 정연(整然)하여 중대신(重大臣)의 묘사(廟祠)라 할 만하다. 그간 송곡(松谷)의 만구(萬九)와 상대(相大) 부회장이 실무(實務)를 맡아 밤낮으로 지획(指劃)한 공(功)이다. 아! 선인들의 중수에 못지않으니 후인들이 어찌 이 재사를 길이 수호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경건(敬虔)히 제사 올리면서 훈호처창(焄蒿悽愴)을 체험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후식하며 선조의 사업을 익히고 효제(孝弟)와 충신을 실천하지 않겠는가? 이에 사실과 느낀 바를 대략 얽어 이곳에 오르는 자에게 관성(觀省)의 꺼리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