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방산재

 

 

방산재

 

방산재는 석계공 하세희(河世熙)의 증손 사함(士涵) 홍태(洪泰) 공과 그 후손들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1948에 사함공(士涵公) 홍태(洪泰)의 증손 재우(載禹) 공께서 후손들의 뜻을 모아 창건하여 선조님들의 제향을 봉향해 오다가 세월에 못 이겨 재실이 퇴락되자 1993년 5월에 다시 중수하였다.

 

 

방산재기(房山齋記)

 

진주 서쪽 사곡은 하씨의 세장이다. 중세의 사함공 휘 홍태는 처사 휘 달중(達中)의 삼자로 분가하여 방곡에 살았다. 이곳은 사곡과 일리 정도로 가까우니 나아가서는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효우를 행했으며 물러나선 농사짓고 근검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만년에는 곡중에 모옥을 지어 노래하며 스스로 즐기더니 세상을 떠나자 거주지 동쪽 산기슭에 장사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는 지금부터 백여 년 전이지만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가옥이 즐비하며 담장이 연이어 넉넉히 일가를 형성하였다. 내 일찍 이곳을 자주 지나면서 보니 어른들은 진실하고 후덕하여 상고의 기풍을 지녔으며 젊은이들은 근면하고 예가 발라 윤상의 직분을 잘 지켰다. 이에 공의 유풍과 교훈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더욱 칭찬하였다.

지난 병술년 증손 재우 씨가 제족의 의론을 수렴하여 삼간 사영의 재사를 공의 묘하에 지어 예를 닦고 화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더니 문장의 일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주손 선진 씨가 제족으로 더불어 이를 계승하여 완성하고는 지명을 인하여 방산이라 편액하고 재종제 몽진으로 하여금 나에게 기문을 청하게 하였다. 내 가만히 생각건대, 천하의 일이란 정성이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자손이 선조를 위한 도리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서경에 말하기를 ‘선고가 집을 지으려고 이미 규모를 갖추어 놓아도 그 자식이 마루를 만들기조차 싫어하거늘 하물며 집을 완성하기를 좋아할까?’라고 하였으니 집을 즐겨 완성하는 이의 정성이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참으로 즐거워함이 아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네 조상을 생각지 않으랴, 그 덕을 닦으라.’하였으니 덕을 닦는 이의 정성이 이를 말미암지 않으면 진정으로 닦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하씨들이 이 골짜기를 공의 유지요 장수소라 하여 이를 짓기에 뜻을 둔 지 수년 만에 마침내 완공하였으니 그 선인의 뜻을 이어 재사를 완성시킨 정성을 족히 보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극한 정성이라 한다면 옳지 않다. 대저 나아가 그 덕을 닦아 위로는 선조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손에게 모범을 드리워서 세세로 추념케 하고 인인으로 닦게 한 연후에야 지극한 정성이라 할 수 있다. 선진 씨는 제족으로 더불어 어찌 서로 이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신축(辛丑)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