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경절사

 

 

경절사 전경

 

진주성(晉州城:국가사적 제118호) 내에 위치한 경절사는 진양하씨 시조 고려 충절신 하공진(河拱辰) 공의 사당이다. 이곳은 진양하성(晉陽河姓)의 성역일 뿐 아니라 고장의 명소로서 구국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경절사의 구조는 상단 중앙에 삼 칸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고 사당 내부 정면에 하공진 공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있다. 사우 동편의 3칸은 전사청(典祀廳)이다. 하단 우측에는 각종 행사시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충의당(忠義堂)이 있고, 좌측에는 제향 때 후손들이 재명(齋明)하는 장소인 수덕재(修德齋)가 있다. 그리고 충의당 경내(境內)에 이곡(二谷) 병태(炳台 : 1926~2015) 후손이 경절사 연혁을 기록한 작은 표지석(表識石)이 있다.

 

공진당(拱辰堂) 옛터에 자리 잡은 이곳 경절사는 우리 민족의 정기와 자주정신을 선양하는 도량(道場)이며 구국충절을 거양하는 표상으로 영구히 현창하고 보존해야 하는 사적지로 자리하고 있다.

 

경절사

 

 

상향문(常享文)

 

한마디로 적을 물리치고                                單辭却敵

이국에서 순절하니                                       絶域殉節

공신각이 비록 없어지더라도                          雲臺雖沒

충절은 저 높은 태양에 걸려 빛나리                 高懸烈曰

 

 

경절사 봉안문(奉安文)

 

유세차 갑자(1804) 십이월 정축삭 십오일에 후손 봉운(鳳運)은 시조 증문하시랑평장사부군의 영령께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나이다. 만약 근원이 깊지 않다면, 흐름이 어찌 멀리 갈 수 있으며, 뿌리가 단단하지 않으면 가지가 어찌 무성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더욱 그러하오니, 할아버지가 없으면 손자가 없겠지요. 조상의 음덕이 흘러내려서, 후손들이 번창한 것입니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답해야 하오니, 그 은혜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우리 시조이시여! 만고에 충절을 지킨 신하십니다. 지혜로운 말 한 마디로 적을 물리치시어, 나라가 위태로운 경지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신은 요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지만 자나 깨나 조국을 그리워하셨습니다. 탈출하여 돌아올 방법을 가만히 도모하여 준마를 비밀리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요나라 임금이 염탐하여 알고서, 가혹한 국문을 가하였습니다. 늠름하게 사실대로 답변하시며, 털끝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고려의 신하이니, 두 마음 먹는 것은 바로 역적이라오.” 온갖 방법으로 회유해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역사책에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적의 나라에 시체 버려졌으니, 묘소를 만들 수가 있었겠습니까? 공신각에 화상을 그려 걸었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추모하는 마음 붙일 곳이 없었기에, 후손들은 부끄러워하고 답답해했습니다. 사당을 세워야만 한다고, 후손들의 논의가 세차게 일어났습니다. 낙수암(落水巖)의 기슭에다 터를 잡아 집을 지었습니다. 이에 길한 날을 받아 위패를 받들어 모시나이다. 경건하게 제기를 진설하고서, 성(誠)을 다해 정갈하게 제사 드립니다. 봉안하는 일이 비록 늦었지만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흠향하시옵소서. 많이 인도하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숭배하고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維歲次甲子十二月丁丑朔十五日後孫鳳運敢昭告于始祖贈門下侍郞同平章事府君之靈伏以源若不深其流何長根若不固其枝何昌人則尤然無祖無孫蔭澤之流雲仍滋蕃溯源報本其恩敢諠歟肇祖萬古節臣智言却敵國免邅迍身俘於遼寤寐祖國圖脫計密置駿足主詗知加以酷鞠毅然供實毫不攝伏我是麗臣貳心乃逆懷柔百端不屈被戮貞忠大節長光史冊遺屍敵地遑修墓域繪像麟閣歲久湮蹟寓慕無所後孫愧鬱廟宇之創裔論峻發相地架構落水之厓乃涓吉辰奉安位牌虔陣籩豆湮享盡沈揭虔雖晩寬諒降歆洽賜導佑益切崇欽

 

 

경충사(景忠祠) 봉안문(奉安文)

 

삼가 생각건대, 우리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며

무관 출신으로 벼슬은 낭중(郎中)에 올랐고,

측근에서 임금님 지키니, 총우(寵遇)가 특별했네.

뜻밖에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왕실을 덮었고,

천추궁(千秋宮)의 음모가 매우 간특(姦慝)했네.

공은 그 기미를 찾아내어 흉악한 무리를 쫓아내고,

정사(正嗣)를 맞아 임금으로 세우니 하늘의 해는 다시 빛났네.

미련한 저 오랑캐 거란(契丹)이 그 탐욕을 한껏 부려,

대군(大軍)이 국경에 들이닥치니 임금님은 남쪽으로 피난했네.

나라 형세가 위태로워 조석(朝夕)간에도 지키기 어려우니,

공이 이에 임금님께 아뢰고 적진에 가서 해결키로 하였네.

창화현(昌化縣) 적진(敵陣)은 창칼이 삼엄한데

몸을 던져 적진에 다다라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네.

촌설(寸舌)을 휘두르자 대병(大兵)이 문득 물러났으니

사직(社稷)을 붙든 공훈은 태산처럼 우뚝하네.

오직 한스럽게 억류되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구름과 달을 바라보며 몽혼(夢魂)만 조국으로 날아들었네.

저들의 공(公)에 대한 정성이야 무쇠라도 녹이련만,

공(公)의 붉은 마음이야 어찌 바꾸게 할 수 있으랴!

준마를 몰래 길렀으니 천리도 지척이라,

반드시 한 번 떨치어 내 돌아갈 날 있으리라!

누가 이 계획 폭로하여 저들에게 고신(拷訊)을 당할 때

“나에게는 나의 임금님만 있을 뿐 내 마음 돌과 같이 변함없으니,

칼과 톱날인들 어찌 두려워하랴!” 항거하는 말 더욱 격렬하네.

마침내 오랑캐 조정에서 피를 뿜으며 인(仁)을 이루었으니,

열렬한 충의(忠義)는 가을하늘에 빛나는 태양일레라!

송(宋)나라 신국공(信國公)이 공과 짝이 될 만하리라.

왕이 공의 충절 사모하여 초상화를 그려 각(閣)에 모셨고

번성한 후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네.

오직 이곳 터전은 산 좋고 물이 맑아

마땅히 신령한 기운 모아 영걸(英傑)을 길러내니,

백세토록 칭송되리라, 공이 탄생한 자취여!

많은 선비들 이곳을 지나며 길이 장엄한 공의 모습 그리며

한결같이 뜻을 모아 새롭게 사당을 세워

신주(神主)를 편안케 모시고 좋은 날 가려 제사 드리니

온갖 제물은 가지런하고 희생(犧牲)과 술도 정결하도다.

삼가 바라옵건대, 현명한 영령(英靈)께서는 살펴 강림(降臨)하소서!

 

 景忠祠奉安文

恭惟我公。 天賦英卓。 出身韎韋。 進陞郞職。 側近宸門。 寵遇以特。 不意暗雲。 忽圍王室。 千秋之宮。 陰謀甚慝。 公探其機。 凶類屠逐。 正嗣迎立。 天日復赫。 頑彼契胡。 恣其貪慾。 大軍壓境。 王遷南域。 國勢岌業。 莫保朝夕。 公乃馳奏。 請往以决。 昌化敵營。 森嚴戈戟。 挺身以赴。 不少畏慴。 掉以寸舌。 大兵遽却。 扶社之勳。 泰山其屹。 獨恨被留。 未還祖國。 瞻雲望月。 夢魂飛越。 雖則彼誠。 可鎔金銕。 而吾丹心。 詎能使易。 養我駿馬。 千里咫尺。 會將一奮。 我歸有日。 孰露此計。 遭彼栲詰。 我有我君。 我心如石。 刀鋸奚恤。 抗言愈激。 竟於虜廷。 噴成仁血。 烈烈忠義。 秋旻光日。 有宋信國。 可與之匹。 王慕公節。 圖形於閣。 振振後孫。 其麗不億。 維玆之基。 山明江澈。 宜其鍾毓。 以英以傑。 百世尙說。 誕公之蹟。 多士過此。 永懷僴瑟。 詢謀僉同。 新廟載立。 治主以妥。 日月之吉。 籩豆其整。 牲酒其潔。 伏惟明靈。 尙其鑑格。 - 權昌鉉 撰, 河萬興 譯

 

 

고려대전(高麗大殿) 봉안문(奉安文)

 

오호(嗚呼) 선생(先生)은 진양하씨(晉陽河氏)의 시조(始祖)로서 성충(誠忠)이 초절(超絶)하고 기개(氣槪)가 강직(剛直)하였도다.

 

일찍이 성종조(成宗朝)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고 목종조(穆宗朝)에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는데 왕(王)이 병들자 근전문(近殿門)에서 수직(守直)하였도다. 현종(顯宗) 초(初)에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초천(超遷)되었다가 좌죄(坐罪)되어 원도(遠島)에 유배(流配)되었도다. 때에 거란(契丹)이 강조(康兆)의 토벌(討伐)을 명분(名分)으로 삼고 내침(來侵)함에 복직(復職)되어 왕을 남행(南幸)길에서 배알(拜謁)하고 청화(請和)를 아뢰었도다. 드디어 왕(王)이 그 의견(意見)을 가납(嘉納)하고 곧 선생(先生)에게 표장(表狀)을 받들게 하여 거란영(契丹營)에 보내니, 이에 선생(先生)은 지모(智謀)로써 구진(具陳)한바 왕을 추격(追擊)하던 군사(軍士)가 돌아서게 하였도다. 이듬달에 선생(先生)은 거란주(契丹主)에게 나아가 설득(說得)하여 거란군(契丹軍)을 철수(撤收)하게 하였으나 선생(先生)은 거란(契丹)에 끌려가 연경(燕京)에 억류(抑留)되었도다. 선생(先生)은 내심(內心)으로 환국(還國)을 도모(圖謀)하되 밖으로는 충근(忠勤)을 보이니 거란주(契丹主)가 심(甚)히 총우(寵遇)를 가(加)하여 양가(良家)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도다. 이에 선생(先生)은 준마(駿馬)를 많이 사서 동로(東路)에 배치(配置)하고 환국(還國)의 기회(機會)를 엿보았더니, 사전(事前)에 일이 탄로(綻露)되어 거란주(契丹主)의 친국(親鞫)을 받았도다. 선생(先生)은 몸을 돌보지 않고 실정(實情)으로 대답(對答)하였으니, 본국(本國)에 감(敢)히 이심(二心)을 둘 수 없고 살아서 대조(大朝) 섬기기를 원(願)치 않는다고 하였도다. 거란주(契丹主)가 의(義)롭게 여겨 절개(節介)를 고쳐 충성(忠誠)하기를 설유(說諭)하였으나, 그 강개(慷慨)한 사기(辭氣)는 더욱 폭려(暴厲)하고 불손(不遜)해진지라 마침내 순국(殉國)의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도다. 뒤에 문종(文宗)은 칙령(勅令)을 내려 능(能)히 삼촌설(三寸舌)로써 대병(大兵)을 물리친 공(功)을 녹(錄)하고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하라 하였으며, 선생(先生)에게는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증직(贈職)하고, 그 후에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를 추증하였도다. 아아! 선생(先生)의 성충(誠忠)은 일월(日月)처럼 밝고 선생(先生)의 현공(顯功)은 태악(泰嶽)처럼 높으시도다. 이제 고려선양회(高麗宣揚會)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좇아 감(敢)히 존령(尊靈)을 호국실(護國室)에 봉안(奉安)하고, 드디어 태묘(太廟)에 준(準)하여 공경(恭敬)히 천신(薦新)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평안(平安)을 누리소서.

 

 

시조사당(始祖祠堂) 경절사(擎節祠) 내력(來歷)

 

문헌 기록에 따르면 진양하씨 문중에서 처음으로 시조 평장공(平章公) 제향(祭享)을 올린 것은 1804년(純祖 4년) 갑자(甲子)이다. 수곡면 사곡리에 있는 낙수암(落水巖)에 함와공 주도로 시조공 사우(祠宇)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河鳳運 奉安文) 음력 12월 15일 사림봉사(士林奉祀)하였다. 그 후 서원(書院) 철폐령 때 일시적으로 중단했으나 1868년(고종 5년) 묵와(默窩) 계현(啓賢) 공이 창도(唱導)하여 중건(重建)하고 나라의 명(命)을 받아 시조공 부조묘(不祧廟)로서 경절사(擎節祠)라고 칭(稱)하여 자손 봉사(子孫奉祀)하였다.

 

그러다가, 광복과 6·25동란의 격변기를 거치고 1954년에 시조공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시조공 유적지인 옛 공진당(拱辰堂) 구허(舊墟)에 시조공 사우(祠宇)를 세우기로 의논하고, 회장에 하영진(河泳珍), 부회장에 하순봉(河恂鳳), 총무에 하계진(河啓鎭), 재무에 하용진(河龍鎭)을 임원으로 정하여 기성회(期成會)를 결성하고 각 문중 첨종(僉宗)에게 의로운 일에 정성껏 참여하도록 통지문을 보내는 한편, 사우 부지용으로 진주시 남성동 167의 3번지 238평을 매입하였다. 이곳은 경상우병영 내의 공진당(拱辰堂)이 있었던 자리이다. 17세기 중엽 진주성 안에 경상우병영이 들어설 때 병영의 운주헌(運籌軒) 뒤에 공진당이 위치했다고 여러 문헌에서 전하고 있는데,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진재(眞宰) 김윤겸 화풍(畵風)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19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晉州城圖(복사본 충의당 소장)」에도 공진당이 잘 나타나 있으니, 공진당은 조선 후기 내내 진주성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진당이 언제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문헌(文獻)을 찾지 못하여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촌(柏村) 하봉수(河鳳壽) 선생이 지은 「공북당(拱北堂)」이라는 시(詩)의 해제(解題)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살펴보건대, 병영(兵營)이 이설(移設)된 것이 어느 때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지(州誌)를 고찰(考察)해 보면 지금의 가이곡(嘉耳谷), 오이곡(梧耳谷), 조동리(槽洞里), 사죽리(沙竹里), 단지동(丹池洞), 금산리(琴山里), 대평리(大坪里), 말문리(末文里) 등의 곳이 모두 병영(兵營) 터지만, 병영(兵營)의 변천 내력(來歷)은 문헌상 밝힐 수 없으니 매우 한스럽다. 지금 병영 자리는 곧 옛날 시랑(門下侍郞) 하공(河公) 휘(諱) 공진(拱辰)의 자취가 남아 있는 터이다. 병영(兵營)을 옮기고 집을 지을 때 특별히 그 유허(遺墟)를 존중하여 시랑공(侍郞公)의 휘(諱)로써 당명(堂名)을 달았다.(按兵營移設未詳在何時考於州志今嘉耳谷梧耳谷槽洞里沙竹里丹池洞琴山里大坪里末文里等處皆其營址而其建置沿革文獻無徵可勝嘆哉今兵營之地卽古侍郞河公諱拱辰之遺址也及移營建堂特敬其遺墟取侍郞之諱扁其堂名)’ 그리고 또 ‘북(北) 자(字)는 본래 진(辰) 자(字)인데 이제 휘(諱) 자(字)를 피한 것이다.(北本作辰今避諱)’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緣由)에서 이곳이 하씨 유적지로 인식되어 시조사당인 경충사(景忠祠)를 건립할 수 있었고, 진주성 성역화 사업 때 성내의 모든 민가와 구조물 철거령에도 보존할 수 있었다.

 

1958년 4월 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년여에 걸쳐 경충사(景忠祠) 6평, 충의당(忠義堂) 24평, 내삼문(內三門) 1평을 건립하여 1959년 4월 24일(음3월 17일)에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제향(祭享)을 올렸다. 이날을 기념하여 매년 음력 3월 17일에 춘향제(春享祭)를 올리기로 하고, 문충공(文忠公)과 양정공(襄靖公)도 종향(從享)하기로 하였다. 이어 1961년 4월 충의당(忠義堂) 앞에 하재근(河在根) 출연(出捐)으로 시조공(始祖公)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1978년에 진주성(晉州城)을 임란(壬亂) 전적지(戰跡地)로서 성역화(聖域化)하는 방침이 정해져 모든 민가(民家)와 구조물 철거령이 내려져, 1979년 1월 13일(陰戊午 12월 15일) 낙수암 경절사 제향일에 충의당 사적지 보존회를 구성하고 회장에 하병태(河炳台), 부회장 4인, 상임간사 6인, 이사 6인, 고문 13인을 선임하였다. 자손들의 뜻을 모아 당국에 보존 건의서를 제출하여 1979년 5월 18일자로 문화재전문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 유지·보존하라는 문화공보부의 방침이 확정되었다.

 

이에, 1981년 음 3월 17일 진양하씨 도청(都廳)을 발족하고 종약(宗約)을 제정하였으며, 임원으로 도청장(都廳長)에 하병렬(河炳烈), 부도청장 3인, 유사 7인, 장의 15인, 감사 약간을 선임하여 1982년 5월 진주문화원과 더불어 시조공 유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취지서를 발간했다. 도청(都廳)에서는 1985년 6월 문공부로부터 경충사와 충의당을 원위치에서 15m 동쪽으로 이건하고 전사청, 내삼문, 화장실을 신축하고, 시조공 사적비를 사당경내로 이건(移建), 조경(造景) 공사를 할 것이며, 공사는 진주시가 주관하고 자금은 도청(都廳)에서 전액 부담하라는 조건으로 승인을 받았으나 자금조달 부진 등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1987년에는 정홍거(鄭弘巨) 화백이 제작한 장(長) 7.5척, 폭 4.5척의 시조공 영정을 봉안하였고, 1988년 6월 19일에는 정부에서 고려충신 사당보수비로 6천만 원을 영달(令達)하고, 사우 경역(境域)을 남북 41.5m, 동서 34m 430평의 부지를 사용하라고 승인했다. 1988년 7월 11일 정부에서 집행하려는 사업규모가 협소하여 확장해 줄 것을 문공부에 건의하였으나 1989년 3월 진주시에서는 경충사가 북장대(北將臺)를 가린다는 이유로 동쪽으로 20m 원형대로 이건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에 1989년 9월 11일 충의당에서 임시종회를 열고 시조공 사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하병태(河炳台), 부위원장 17인, 위원 48인, 상임위원에 하성태(河性泰), 하원식(河元植) 씨를 선임하였다. 1989년 10월 추진위원회는 이곳이 시조공의 유적지며 하성(河姓)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원위치대로 보존해야 한다하고 철거작업을 중지시키는 한편, 사우확장중건의 필요성과 규모를 알리고 헌성금 출연을 권유하는 취지문을 첨종(僉宗)에게 보내고 모금활동을 벌이면서 관계기관에 원위치의 서원(西垣)을 기점으로 동쪽과 북쪽으로 경계를 넓히도록 청원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90년 7월 14일 충의당 26평, 수덕재 22.5평, 외삼문 5.5평의 공사를 전액 종중부담으로 시행하라고 추가승인을 받았다. 1990년 11월 1일(음9월 15일)에는 종회를 열고 충의당은 시조공의 유적지이므로 시조사로 정의(定義)하여 시조공 위패만 봉안하자는 결의에 따라 종향(從享)하던 문충공과 양정공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

 

이상으로 1989년부터 1992년 4월 30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경충사 6평을 철거하고 12평으로 신축하였으며, 내삼문(內三門 : 烈日門) 1평을 3.75평으로 신축하고, 충의당 24평을 남향에서 동향 26평으로 개축하였으며, 수덕재 22.5평을 충의당 구목재(舊木材)와 신재(新材)로 서향으로 신축하고, 외삼문(外三門 : 景仰門) 5.5평을 신축, 전사청(奠司廳) 6평 신축, 원장(垣墻)을 자연석으로 문화재 규격에 맞춰 설치하였다.

 

1992년 4월에 경충사를 경절사로 현판을 교체하고 낙수암 경절사의 시조공 위패를 이안(移安)함과 동시에 수곡면 사곡리 869-1번지 답 2831.6㎡와 863-2번지 답 1637.1㎡를 하종근(河宗根), 하영진(河泳珍) 씨가 시조공 봉사답(奉祀畓)으로 헌납(獻納)했다. 1994년 7월에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朴永錫) 씨가 지은 시조공 사적기(事蹟記)를 충의당에 걸었으며, 1998년 4월에 충의당 앞에 경절사 홍보·안내판을 설치했다.

 

 

경충사(景忠祠) 상량문(上樑文)

 

삼가 다음과 같이 씁니다.

여러 후손들이 낙성을 도모하니, 며칠 만에 훌륭한 모습 보게 되었으니, 백세를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으리. 때때로 향불 피워 제사를 올리니, 사나운 무리들 침범할 근심 막고, 제사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는데 더군다나 나라를 보위(保衛)하다 죽은 선비이랴. 공로가 백성들 윤강(倫綱)에 있으셨네. 삼가 생각하건대 고려 현종(顯宗) 때 충신은 실로 우리나라 진양하씨(晉陽河氏)의 비조(鼻祖)이시네. 산하(山河)의 정기(正氣)를 받고 태어나시어 화이(華夷)의 구분이 엄격히 하셨네. 40만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해 와 외로운 성(城)을 포위하니 오백년 왕업(王業)이 위기일발(危機一髮)인데 시운(時運)이 군색(窘塞)했네. 조정에서는 아무 계책 못 세우고 석양에 임금님을 뒤쫓아 가 뵈었네. 백성들이 다시 군막(軍幕)에 의리로 유시(諭示)하기 바라니, 오랑캐 역시 그 고충(孤忠)에 감탄하였네. 저들 이리같이 끝없는 욕심은 강조(康兆)의 시역(弑逆)에 있지 않고 장차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저들 강토를 넓히려는 것이었네. 강남(江南) 만리 소식 끊어지고 추격병 뒤따라왔네. 우리나라의 당시 마음 어찌 번쩍이는 칼을 두려워했으랴. 앞으로 나아가며 인의(仁義)를 무기로 삼고 사막(沙漠)을 풀방석처럼 여겼네. 준마(駿馬)를 동쪽 길에 줄 세워두었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네. 고생(高生)은 중경(中京)에 나누어 거처하여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네. 마침내 연북(燕北)에서 인(仁)을 이루니, 해와 달이 다시 빛났네. 임금이 바닷가에서 돌아오니 전쟁의 먼지 비로소 나라에서 사라졌네. 당일 인각(麟閣)에 초상을 그렸으니 그 충성심 감격스럽네. 후손들 그 충성 잊지 못하고 고례(古禮)를 좇아서 낙수암(落水庵)에서 제사를 올리니, 원근에서 달려오네. 땅이 경사져서 노약자들은 더러 진퇴(進退)가 어렵네. 다만 탄생하신 옛터에다 집을 지어서 후손들의 사정(私情)을 이어가게 되었네. 지금은 관서(官署)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니, 우리 종족의 전번 계획 이루기 마땅하네. 아, 이곳 진양(晉陽 : 晉州) 옛 고을은 영남(嶺南)의 요충지(要衝地)이네. 아아, 지령(地靈)이 내신 인걸(人傑)들이 일찍이 청사(靑史)에 봉(鳳)이나 용(龍)처럼 빛났네. 참으로 조물주가 마음을 써 안개가 짙고 구름이 피어오르네. 자연이 큰 강을 이루어 두 근원에서 와 합치고, 둘러 있는 푸른 들판은 봄빛이 깊고 칠림(七林)을 이어서 장벽 (障壁)을 이루었네. 후손들 즐겁게 오고 선령(先靈)께서도 기꺼이 임(臨)하시네. 많은 기둥과 서까래를 이웃 고을에서 운반해 크고 좋은 다른 재목을 구하지 않고도 쓰임새에 맞았네. 지세(地勢)에 따라 집을 지으니, 사면이 평평하게 넓네. 지금부터 제사를 밝게 지내 유건(儒巾) 쓴 선비들 다른 종족과 달리 모여들리. 다시 원하옵건대 구업(舊業)에 더 힘을 써서 돈독하고 솔선하는 풍속이 길이 전해지소서. 사람의 일은 만 번 변해서 무상(無常)한데 강산(江山)은 예전 그대로이네. 이에 감히 짧은 노래로 긴 들보를 올리는 일을 돕노라.

들보를 동쪽으로 밀치니, 신령께서 월아(月牙) 동쪽에 밝게 강림하시네.

들보를 서쪽으로 밀치니, 신령께서 덕강(德江) 서쪽에 밝게 강림하시네.

들보를 남쪽으로 밀치니, 신령께서 와룡(臥龍) 남쪽에 밝게 강림하시네.

들보를 북쪽으로 밀치니, 신령께서 방장(方丈) 북쪽에 밝게 강림하시네.

후손(後孫) 우(寓) 삼가 지음

 

謹述夫合衆昆而圖成不日觀隆棟閱百世而不斬以時奉飶香凡禦菑猂患之倫祀有常典况衛國損軀之士功存民彛伏惟麗世顯宗朝藎臣實爲箕邦晉陽河鼻祖早禀山河正氣惟嚴華夷定分當四十萬丹兵壓于孤城嗟五百年王業危如一髮天步窘播羅澨廟算空對西輝追謁于鑾程人庶望再復諭義于氈幕虜亦感孤忠彼谿壑之狼心不在康兆弑逆將陵夷乎鰈域欲拓陑保幅員江南萬里之言已絶追兵在後本朝一天之心寧怕閃刃臨前以仁義爲甲兵視沙漠如茵席駿馬之東路列置旣乖於歸心高生之中京分居無助於運算竟辦仁于燕北日月再光東躔肆返御于海陲埃塵始掃區宇當日之圖形麟閣深有感於荃忠後仍之不忘豺誠憑其禮於古簡水菴妥享遠近不懈駿奔地盤側斜老幼或難進退但誕降遺址久作廨廳匪遠裔私情所可贖得今則官署已移佗處正宜吾族更遂前謀繄此晉康古府雄鎭嶠南猗彼地靈人才早煥靑史鳳翔而龍翥信天造之有心霧鬱而雲蒸迺民物之多傑大江天放自兩源而合襟綠野春深連七林而成障此宜後孫之樂赴抑亦先靈之肯臨旅楹梃桷之運自鄰坊不待千章楠梓正圭中臬之適隨地勢聿觀四面寬平自今祀事孔明緇巾虎韔之士有異佗族更願舊業益懋敦義率履之風遠紹前修人事縱萬變而無常江山持一樣而如昔敢陳短頌助擧脩梁其詞曰

抛梁東靈赫臨乎月牙東抛梁西靈赫臨乎德江西抛梁南靈赫臨乎臥龍南抛梁北靈赫臨乎方丈北    後孫寓謹撰

 

 

평장공 사우 개기축문(平章公祠宇開基祝文)

 

저기 방장산(方丈山)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고, 여기 진양 땅 돌아보니 예로부터 영기(靈氣) 서렸네. 봉산(鳳山) 탁 트인 시원한 땅에 푸른 물이 감돌고, 천지 정기를 갈무리하고 산수(山水) 기운 모였네. 인걸을 탄생시키니 우리 시랑공 할아버지요, 열렬하신 시랑공 고려 때 벼슬하셨네. 국내에서 국외에서 모책 세워 일하시고 세 조정을 두루 섬기면서 직책을 다하셨네. 위태로움 보고 목숨 바쳐 외국에 구류당하여 가관(假館)에서 군사로 유혹하고 협박해도 굴복 안 하셨네. 시종 같은 마음으로 곧은 기운 하늘에 뻗쳐 몸을 바쳐 순국(殉國)하셨네. 그 지킨 절개 해와 달처럼 빛나네. 공자(孔子)는 인을 이루면 군자라 하고 맹자(孟子)는 의(義)를 따른다 하여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네. 충성 극진히 해서 인기(人紀)를 세우니, 인륜을 가진 자 그 누가 어버이 존경하지 않으랴. 역사가는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나라에서 진념해서 초상을 기린각(麒麟閣)에 그리고 품계와 벼슬 높였네. 남은 은택이 아래로 전해 자손들까지 이르렀는데 천년 전해오는 동안 거의 벽해상전(碧海桑田) 되었네. 세대가 멀어져 자취가 사라지고 정령(精靈)이 탄강한 터가 남의 소유 되었네. 길가는 사람도 차탄(嗟歎)하는데 하물며 자손들의 개탄함이랴! 형세가 미치지 못해 여러 대(代) 동안 원통함만 머금어오다가 다행히 오늘날에야 하늘과 사람이 협조하고 여러 후예들 협력해서 옛터를 회복했네. 황폐한 땅 일구어서 사당을 짓고 좋은 날 가려서 경건히 제수와 술잔 올려 정성을 펴옵니다. 신령께서는 때때로 보우해 주시고 만년까지 신령스러운 상서가 길이 있게 하옵소서.

후손(後孫) 용환(龍煥) 삼가 지음

 

瞻彼方丈峻極于天眷此晉陽古擅靈地鳳山爽塏藍水澄洄天地儲精山水會氣篤生人傑我祖侍郞烈烈侍郞昔仕王國居內居外有猷有爲歷事三朝當官盡職見危受命拘留異方假舘耀兵以誘以脅不淫不屈始終一心直氣橫空以身殉道託寄兼節日月爭光孔曰成仁曾許君子孟云取義言殊旨同是曰盡忠立此人紀凡有彛性孰不尊親史氏特書王家軫念圖形麟閣贈秩加官餘澤下流覃被子姓爾來千載經幾海桑世遠蹟湮降精遺址爲他所有行路猶嗟矧是雲孫慨歎曷旣勢有不及累世含寃幸玆今辰天人協助群裔合力圖復舊墟開廢理荒營建祠宇卽事之始涓日良辰謹具肴觴敬陳悃愊維神昭格惟時佑之嗣後萬年靈祥長發    後孫龍煥謹撰

 

 

경충사 상향문(景忠祠常享文)

 

왕실에 극진한 충성 바치고, 이국에서 목숨 바치셨네. 윤리 기강 심으시어 백세의 모범되셨네.

 

 盡忠王室致命殊域扶植倫綱百世矜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