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덕곡서당

 

 

덕곡서당

 

덕곡서당은 처사(處士)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선생이 문도(門徒)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선생께서는 처음 구강정사(龜岡精舍)라는 곳에 있었지만 정사가 너무 좁아 많은 생도(生徒)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諸生)들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泳允)과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지명에 따라 덕곡서당이라 이름 하였고 서당의 편액은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친필 휘호(揮毫)이다.

 

선생은 1918년 유림의 파리장서 사건과 1926년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6년에 서거하셨다.

 

 

덕곡서당기(德谷書堂記)

 

서당은 진주 서쪽 오십리 수곡면 중앙에 있으니 고(故) 대한국(大韓國) 처사 회봉 하 선생이 문도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처음 선생께서는 구강정사(龜岡精舍)라는 곳에 있었지만 너무 좁아 많은 생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과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 규모는 전일에 비해 조금 넓어지고 수죽이 울창하며 시내가 그윽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즐기더니 그 지명을 따서 덕곡서당이라 이름 하였다. 선생은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고 유학의 운수가 장차 망하려는 시기에 태어나 한 몸으로 대임을 짊어지고 어지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 항쟁하였으니 그 마음의 괴로움과 형세의 고단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자초하지 않았는데도 이르는 것은 있지 않다. 오도(吾道)의 쇠퇴는 허세가 번창하여 실지가 병들고 혼란이 일어나 정로(正路)가 막혔기 때문이니 이 어찌 한갓되이 남만 탓하고 스스로 반성할 바를 생각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일생의 힘을 다해 백가에 통달하고 천고를 절충하여 논의를 저술하고 정당함을 밝혔으니 이 모두 명리를 정립하고 인심을 밝게 한 것이 아님이 없다. 심위자모설, 원애, 원양, 국성론 등 제편은 그 극치를 이루고 취지를 다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당에 거처한 지 십 수 년 동안 하루도 전념하여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 온 세상이 지목하기를 우활하고 쓸데없다 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제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서당 또한 폐쇄된 지 십수 년이다. 제생이 선생의 유서를 이미 간행하고 서당에 유독 기문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 어리석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다만 생각건대 평소 선생의 연고로 외람되이 선생의 사랑을 입은 것이 적지 않으니 정의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이때 나에게 이야기하는 객이 있어 말하기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천명이 변치 않으며 도 또한 변치 않는다.’하고, 또 이르기를, ‘천도는 순환하기를 좋아하여 대저 막힘이 극에 달하면 통하게 되고 혼란이 지극하면 다스림이 회복된다.’하였으니 맹자 이하로 이러한 일은 명백히 징험 할 수 있다. 지금의 운수는 그 원근과 지속으로 비록 미리 점칠 수는 없지만 참으로 인물이 나타나 성현의 원제를 구하고자 한다면 선생을 말미암지 아니하고 누구로부터 하겠는가! 내 이로써 선생의 유서가 반드시 후세에 크게 전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당은 하나의 외물일 뿐이니 그 존폐는 마땅히 선생의 도에 크게 연관이 없을 듯하다.”라고 하였다. 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북쪽으로 유람하면서 수사를 보았고 돌아와서 덕산으로 달려가 산천재에 올랐으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암서헌을 방문했고 또 이동, 분천서당에서 일을 보았다. 대개 그 사람을 추모하는 이는 국그릇이나 담장에서도 그 사람을 보고 산천초목에도 정채를 입었는지 물어본다. 하물며 생전에 기거하며 글을 짓고 도를 논하던 자리로 무릇 연적과 금서, 장구(杖屨) 등의 기물이 의연히 남아 있어 문에 들고 마루에 오르면 모습이 보이듯 음성이 들리듯 하여 우러러 상상하며 감격함이 적지 않음에랴! 이제 서당은 제생에게 있어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서당에 나아가 해마다 석채례를 행한다. 또 특별히 문자를 구하여 도리 사이에 걸어두고 오로지 지난날을 본받는다면 후세에 힘을 합쳐 끊임없이 개수하는 성대함이 장차 유서로 더불어 시종을 함께 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객이 수긍하고 물러가기에 드디어 이를 적어 제생에게 고한다.

1961년 신축(辛丑) 맹춘일(孟春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