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송강정사

 

 

송강정사

 

송강정사는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 하위보(河魏寶)의 장자 송강 하항(河恒)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11일이다.

 

송강(松岡) 하항(河恒) 공과 아드님 모송재(慕松齋) 인상(仁尙) 공 부자는 순조 33년(1833년) 진주 서쪽 마동의 남강변에 세워진 청계서원에 은렬공 정신열, 퇴헌공 정천익 등과 함께 배향되어 춘추로 유림에서 향사를 받들었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으로 제향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송강정사(松岡精舍)를 중건하고 일헌(一軒)을 정하여 모송(慕松)의 편액을 걸고 우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본래 송강정사는 송강공이 만년에 송강(松江) 가에 세워 장수(藏修)·양병(養病)하던 정자(亭子)였는데 중도에 소실(燒失)되었던 것이다.

 

 

중건기(重建記)

 

남명 선생은 연원이 성대하여 남방에 두루 퍼져있고 진양은 그 명성과 인망이 높은 사람들의 구향이라 여운이 미친 바가 마땅히 다른 고을보다 특별한 점이 있다. 송강 선생 하공은 친히 옷을 걷고 당에 오른 반열에 들었으며 동문 제현으로 더불어 서로 강마하여 그 덕을 이룩하였다. 그 내수에 돈독하고 척사에 엄정하며 뜻 세워 함양하고 문달을 구하지 아니함은 더욱이 노 선생의 법문 규범이 그러하다.

그 아들 모송재공은 일찍 진사에 합격하여 혼조의 흉론이 바야흐로 퍼지는 것을 보고 면전에서 배척하기를 꺼리지 아니했으며 이를 멀리하기를 마치 더럽힘을 당할 듯이 하였다. 이에 향리로 돌아와 학도를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으니 그 윤기를 바로잡고 지조를 숭상함은 또한 전형의 계승이자 사법의 전수이다. 예전에는 향리에 청계현사가 있어 공의 부자를 행사하였으나 이내 폐지되어 행하지 아니하고 송강으로 이름하여 남아있던 정자도 또한 중간에 불에 타 무너졌으니 세상이 변하여 물을 수 없어 공의 아름다운 덕이 점점 잊히어 갔다. 이에 송강정사를 중건하고 그 일헌을 정하여 모송의 편액을 걸고는 때로 모이어 우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후손 용환이 이에 앞장서 문중에 제의하고 사림이 좇아 계(契)를 만드니 그 또한 공의(公議)가 공을 우모함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로다. 하루는 용환군이 여러 사람의 뜻으로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더니 나도 함께 연원의 세의가 있다하여 사양함을 용납지 않았다. 또 이 역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있었고 나의 선인이 처음으로 당장(堂長)을 맡았으니 비록 내 불초하나 어찌 감히 외면하겠는가? 가만히 이르건대 사문의 흥망은 천수에 있지만 그 실은 또한 인위를 말미암아 생기지 않음이 없다. 사람들의 상언에 현인을 받들고 도를 수호한다고 말하지 않음이 없지만 받든다 해도 그 받음을 볼 수 없고 수호한다 해도 그 수호에 참여함이 없으니 이는 다름 아니라 명분으로써 하고 실행으로 아니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바로 근래에 유문의 쇠퇴는 거의 다시 수습할 수 없으니 이른 바 연원도 장차 어느 자리에 의탁할지 알 수 없다. 이것을 어찌 오로지 시운의 불행에만 원망을 돌리겠으며 또한 어찌 일반 나약한 이들이 그 헌사를 담당할 것이겠는가! 정백자가 안락정을 송축하여 말하기를, 물을 차마 폐지할 수 없고 자리를 차마 황폐히 할 수 없으니 아! 정학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물과 자리의 폐지와 황폐도 차마 볼 수 없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단지 정학의 잊을 수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이로써 마음에 새겨 모여서 강습할 때는 정학의 잊을 수 없음을 먼저 찾고 평소 실천함에 항상 완악한 이를 청렴히 하고 나약한 이를 자립하게 하는 기상을 친견하듯이 한 연후에 비로소 현인은 받들고 도를 수호하는 실체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사문에 도움이 되리니 이는 또한 일가 일향의 사업일 뿐만 아니다.

 

나는 보잘것없어 대강 그 단서를 말했을 뿐 그 설을 능히 다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동지 제공은 이에 더욱 성찰하여 분발의 결실이 있도록 추구할 것이다.

기해(己亥, 1959년) 복월(復月) 상완(上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