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경죽당

 

 

경죽당(죽헌공 재실)

 

경죽당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의 7남인 통훈대부 장수현감을 지낸 죽헌공 하성(河惺)의 제향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동향에 죽헌공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은 해가 오래되어 무너져 비바람을 막기 어렵게 되자 종손 창봉(昌鳳)이 재원을 출연, 중수하여 현재와 같이 재실과 영정각의 미간이 새롭게 바뀌어 백대의 재실이 되었다.

 

 

중건기(重建記)

 

진주의 단목은 우리 진양 하가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인데 가문이 매우 번성하여 우뚝하게 남쪽 지방의 이름난 마을의 하나이다. 마을 가운데 각 다섯 파(派)의 재사(齋舍)가 화려하게 서로 연이어 있는데, 경죽당은 그 하나이고 옛 통훈대부 장수현감 죽헌 선생의 후손이 선생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선생은 소경왕(昭敬王 : 선조) 시대의 사람으로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고 인자하였으며 뜻과 생각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충순하였다. 수우 최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수우의 학문은 곧 남명의 학문이었으므로 경의의 참뜻을 터득하여 가슴에 붙들어 놓치지 않고 넓히고 채워나갔으며, 학문에 둔 뜻이 활달하였고 큰 법도가 있었다. 선비들과 벗 사이에서 두터운 명망이 있었으므로 함께 도의로 교유한 자들이 모두 당대의 대현들이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노파(蘆坡) 이흘(李屹), 태계(台溪) 하진(河溍) 같은 선생들이 그가 별세하자 모두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어 뇌사(誄詞)를 지어서 조문하였다.

 

동계 선생 만사에, 삼척(三尺) 남짓한 거문고 안고 탄주하면, 그대만 귀 기우려 곡조를 알아들었네, 지금 현을 끊어 다시 잇기 어려우니, 맑은 소리 덮어두고 다시 타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니 그 명망이 두터웠음을 알만 하다 그가 생부인 진평군(晉平君)의 상을 당한 것이 임진년에 왜적이 날뛰던 때였으나 곡읍(哭泣)하고 제사 드리는 절차를 예법에 따라 마쳤고 3년상을 벗고 망우당 곽 선생의 의병의 군진에 가서 가담하였으니 전술과 전략이 ‘화왕록(火旺錄)’에 모두 기재되어있다. 그리고 정유재란에 아우 단주(丹洲) 선생 변(忭)을 난리통에 잃었는데 일본에 붙들려가서 지낸 지가 무릇 19년이나 되었다. 셋째 형 진사 창주(滄洲) 선생 증(憕)과 막내 동생 진사 단지(丹池) 협(悏)과 함께 갖은 고생을 다하여 찾아서 마침내 생환하게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하씨의 효성과 우애를 흠모하여 시를 지어 읊었으니 그 얼마나 거룩한가.

 

오호라! 선생의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다. 그 남긴 교훈과 양향이 지금껏 사라지지 않았으니 선생의 선생다움을 알만하다. 경죽당이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여 바람과 비를 가리기가 어려웠으므로 주손 창봉(昌鳳)이 먼저 큰 자금을 내놓고 그 나머지는 각기 힘에 따라 부담하여 옛터에 모두 새로운 재목으로 옛 것을 바꾸어 새로 짓고 영각(影閣)을 보수 하였다. 이에 높고 찬란히 새롭게 되어 백세의 멋진 풍경되었으니 조상의 뜻을 이어나가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어떤 세상인데 어디에 이런 정성이 있겠는가. 일을 시작할 즈음에 주손 창봉(昌鳳)이 족숙 병열(炳列) 씨를 통하여 동근(東根)에게 상량문을 구하기에 동근이는 늦게 태어났고 사람됨이 변변찮아 선생 행실과 덕망의 만분의 일도 비슷할 수 없으나 고맙게도 방후손의 의리가 있으니 글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사양할 수 없어 정중히 육위가(六偉歌)를 지어 노래하였다. 얼마 뒤에 또 기문을 묻기에 이것도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삼가 중건의 기문을 지었을 따름이다.

경오(庚午 1990년) 유하절(榴夏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