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원계정

 

 

원계정

 

함양군 도천리에 있는 정자로, 양암공 6대손인 하일(河鎰)이 이병상(李秉常)과 풍류를 즐기던 곳에 200년 뒤 원계 하재섭(河在涉)이 영모재를 지었고 그 아들 하정식(河定植)이 7대조 일(鎰)을 추모하여 원계정을 세우고 아들 하종철(河宗澈)이 기와를 이어 완성하였다.

 

 

원계정기(遠溪亭記)

 

원계(遠溪)가 뇌계(㵢溪)에 다다른 곳에서 위로 바라보면 은연히 성곽이 에워싸듯 작은 여러 산들이 모여서 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금 아래 평평한 언덕에 솟은 터에는 큰 바위가 편편하고 넓어서 자리를 거의 수십 장을 펼 수 있고 그 밑의 골짜기는 오목한 못이 되어 냇물과 더불어 머금고 토하면서 검푸르기에 무엇이 엎친 듯 하니, 이르기를 이심대(理尋坮)라 한다. 이 대(坮)는 본래 명승(名勝)으로 일컫지 않았으나 그 이름이 군지(郡誌)에 드러났으니 어찌 그 사람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옛 하공 휘 일(鎰)이라는 분이다. 공이 일찍이 이공(李公) 병상(秉常)과 더불어 이곳에 노닌 것은 이백여 년 전이다. 전과 다름없이 옛 물건은 타성(他姓)이 점유한 바가 아니니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금년 여름 유월에 공의 7세손 정식(定植)이 비로소 정자를 그곳에 수축함에 역사(役事)를 마치기 전에 와서 기현(琪鉉)에게 이르기를 “내 선대의 묘소가 원계에 많이 있으므로 선군자(諱 在涉)가 이미 영모재(永慕齋)를 지었고, 한가하게 왕래하면서 반드시 이 대 위에 멈추어 ‘선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니 사라지게 할 수 없다.’하고 드디어 덤불을 치고 이름을 새긴 돌을 씻어내어 새롭게 하였고, 또 그 곁에 원계동이라 새겼으므로 원계(遠溪)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내가 오늘에 정자를 세우는 까닭은 진실로 조선(祖先)의 터에서 났으므로 그 정인즉 더욱 어버이 생각이 간절하다. 그대는 우리 정자의 이름에 뜻 없이 기문을 쓰겠는가.”하였다. 나는 가로되, “옛날 윤공의 정자는 성씨(姓氏)로써 명명(命名)했고 광록(光祿)의 집은 관(官)으로써 했으니 홀로 공의 자호로써 원계라 명명(命名)하면 아니 되겠는가?”하니 군(君)은 내 뜻이니라 하였다. 얼마 안 가서 군(君)이 불행히 역병을 만나 하룻밤에 문득 가버렸으니 이 어찌 선조를 위하는 것이라 여기겠는가! 그 사자(嗣子) 종철(宗澈)에게 권하니 종철이 이에 울면서 지붕을 덮어서 기와를 이고 횡함(橫檻)을 둘러 고성(告成)함에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슬프다, 그 양대(兩代)라 어찌 나로 하여금 사양하게 하리오. 내 이미 시를 지어 곡하며 이르되 “뇌양천석옥수성(雷陽泉石屋數成)하니 탁아위문차명명(託我爲文且命名)이라. 종아위부군부재(縱我爲父君不在)하니 공량잔월배상정(空樑殘月倍傷情)이라.(뇌계 양지 돌 위에 정자를 이루고 나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고 또한 이름을 짓게 하였네. 아버지 위해 나를 부추기지만 그대 있지 않으니 빈 집에 비치는 새벽달이 갑절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네.)”하였으니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그윽이 생각하니 정자(亭子)를 짓는 그 처음에는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나 몇 대 뒤에는 언덕의 가시밭으로 변할 것이거늘, 사람의 일인즉 문득 가고 문득 오기에 족히 믿지 못하는 것을 떳떳이 세상에 비유하였으니 그 사람이 가히 참되게 전하지 아니하리오. 이 정자는 그러하지 않음이 있느니라. 앞대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이백여 년이나 온전하였고, 양 대의 후덕이 천명되어 선대의 징조가 또한 이 같으니 종철이 또한 이런 마음으로써 지키고 또한 이 마음으로써 장차 자손에게 전하여 끊이지 않는다면 이는 좋게 전할 보배가 될 것이며 문득 가고 문득 오는 것이 아닐 것이니 정자 이름의 멀 원자는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좌우 산천의 좋은 경치와 하늘과 들과 구름과 연기의 아득한 아지랑이에 고기 잡고 나무하며 장사꾼 나그네의 왕래하는 모습은 가히 노니는 사람의 바라볼 거리를 갖추었나니 나는 궁구한 이론을 숨기지 아니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