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사하재

 

 

사하재(泗河齋)는 양정공(襄靖公) 후 사천문중에서 입향조 휘 대희(大熙) 공 이하 선조들의 시제(時祭)를 받드는 곳이다. 종장(宗丈) 만홍(萬洪) 씨가 주도(主導)하고 종원(宗員) 치생(致生) 씨와 봉욱(鳳旭) 씨가 힘써 도와 건립하였다. 재실 뒤에는 중추공(中樞公) 휘 원일(元一) 공 장손인 처사공 휘 용관(龍寬)의 사(四) 내외분 묘소가 있고, 묘소 앞에는 처사공 계배인 열부(烈婦) 분성김씨(盆城金氏) 정려비가 있다.

 

 

사하재기(泗河齋記)

 

사천(泗川) 읍(邑)에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정동면(正東面) 초입(初入)에서 이구(泥丘)산을 마주하게 된다. 그 아래로는 사수(泗水 : 泗川江)가 흐르고 있는데 산천(山川)의 이름에서 보듯 공부자(孔夫子) 같은 현인(賢人)의 은거지인 양 아늑하고 평화롭다. 강 건너 양지(陽地)바른 언덕에 ‘열부 분성김씨 정려비(烈婦盆城金氏旌閭碑)’가 우뚝하고 그 아래 현대식으로 지은 재사(齋舍)가 있으니 사하재(泗河齋)라 한다. 편명(扁名)을 ‘사하(泗河)’라 한 것은 이곳 사천(泗川)에 사는 진양하씨(晉陽河氏)들이 사수(泗水) 가에 세운 재실이라는 뜻에서이다.

 

조선 초에 북방을 개척하고 안정시키는 데 위명(威名)을 떨쳐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휘 경복(敬復) 장군의 9세손 휘 대희(大熙) 공의 후손들이 선조(先祖) 봉향(奉享)을 위해 세운 것이다. 대희(大熙) 공은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자(長子) 종일(宗一) 공은 장천(獐川)에서 대를 이어 그 후손들이 노천·초전·서포문중을 이루고 있으며, 차자(次子) 원일(元一) 공은 건지미(乾占)로 이거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그 후손들이 건지미에 세거(世居)하면서 건지미문중을 이루어 사천문중의 구심점(求心點)이 되었고, 삼자(三子) 주일(周一) 공은 사남 죽천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죽천문중을 이루고 있다.

 

이전에 재실 조금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입향조(入鄕祖) 대희(大熙) 공 이후 선조들의 시제(時祭)를 봉행(奉行)하였는데 기후(氣候)가 순조롭지 못할 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모소(寓慕所)를 마련하는 것이 제종(諸宗)들의 숙원(宿願)이었는데 사세(事勢)가 여의(如意)치 못하던 차, 열부(烈婦) 분성김씨(盆城金氏)의 음덕(蔭德)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분성김씨(盆城金氏)는 대희(大熙) 공의 차방(次房) 증손(曾孫)인 처사(處士) 휘 용관(龍寬)의 계배(繼配)인데, 정조(正祖) 16년(1792년)에 부군(夫君)을 따라 순절(殉節)하니 암행어사 이화(李墷)가 상주(上奏)하여 당시 동구(洞口)였던 청널목에 정려(旌閭)가 찬란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자구(滋久)하여 빗돌만 우뚝하였는데 도로(道路) 확장으로 부득이 이설(移設)해야 했기에, 그 보상비(補償費)와 후손들의 정성(精誠)을 모아 비(碑)를 옮기고 이 재사(齋舍)를 마련하여 종원(宗員)들의 숙원(宿願)을 풀었으니, 이는 선조(先祖)의 복도비육(覆燾庇育)하신 경행(慶幸)이요 후손들의 숭조정신(崇祖精神)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재사(齋舍)는 삼 칸으로, 재명(齋明) 장소인 실(室)과 제향(祭享) 장소인 당(堂)이 구비(具備)되었으니 선조봉향(先祖奉享)에 충분하다. 조선(祖先)을 받드는 데 재사(齋舍)의 규모는 중요치 않다. 재사(齋舍)가 크든지 작든지, 화려하든지 검소하든지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고 오로지 후손들의 감은보본(感恩報本) 정신이 어떠하냐에 달렸으리라. 하물며 이곳 하씨(河氏)들의 감응(感應)을 보았음에랴!

이 일을 처음부터 주도(主導)한 분은 종장(宗丈) 만홍(萬洪) 씨이고 종원(宗員) 치생(致生) 씨와 봉욱(鳳旭) 씨가 힘써 도왔다. 재사(齋舍)를 건립한 지 약 4년 후에 대종회(大宗會) 일로 친하게 된 봉갑(鳳甲) 씨가 어느 날 재주 없고 견문이 미천한 불녕(不佞)에게 대강의 전말(顚末)을 말하며 기문(記文)을 요구하기에 사양하다가 지인(知人)의 근심을 덜기 위해 부득이 위와 같이 적었다.

갑오(甲午, 2014년) 음(陰)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