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영모재

 

 

영모재(밀양대항)

 

영모재는 밀양에 사는 하씨 종중의 각종 행사나 선조의 제향을 봉향하는 재실이다. 밀양 대항에 위치한 이곳은 호군공 비(備)의 5세손 영모공(永慕公) 재정(再淨)이 18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청송으로 피난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귀향하여 선조의 유적을 추감하여 지은 것이다. 재실 편액을 영모재라 이름 했는데 후손들이 공의 호로 삼았다.

 

 

영모재기(永慕齋記)

 

본 재실은 처음으로 창건한 것이 곧 명나라 만력 연간이었는데, 선조 영모재공의 묘소가 있어서 그대로 이름붙인 것이다. 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몸을 빼어 청송 땅으로 화를 피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다닐 때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뜻을 개연한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 그 중에 명나라 장수가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조선의 해가 다시 빛나 종묘사직이 편안하니, 요행히도 난리를 격고 살아 태평한 날이 돌아 왔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글자마다 충(忠)과 분(憤)이 서려있다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바다로부터의 전쟁 기운이 막 걷히고 조정의 천명이 새롭게 일어나서 충렬 가문을 찾아 훈구의 후예들을 등용하면서, 청요직의 벼슬 하나를 선대의 음덕으로 이어 받았으니, 성은의 지극함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에는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 서글피 일어 돌아가신 부모님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동서 언덕 선산 옛터에다 몇 칸 재실을 지어서 영모재라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어지신 중조(中祖) 돈재공과 낙포공의 유지(遺志)를 추모함이다.

 

지금까지 300년 사이에 먼 후손들이 변함없이 예전 그대로 이어받아 수리한 것이 몇 번이었다. 옛날에 큰 글자 석자로 쓴 현판이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어 폐지되었으니 어찌 잔약한 후손들이 깊이 개탄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올해 겨울에 동종의 의론을 모아 현판의 호칭을 새로 만들어 걸고 옛 사당에 회칠을 새로 하여 우리 선조 돈재공과 영모재 두 분의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하였다.

 

아아 아름답다! 수 백 년 숨겨진 광채와 덕성을 오늘 제사 모시는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래도록 선비들이 우러러보고 후손들이 바라보며 추모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재력이 없고 힘이 모자라서 묘궁의 제도를 크게 하여 참봉 낙포공과 같이 실제 행적이 있는 분을 두 분의 사당에 함께 모시지 못한 것이다. 이는 곧 후손들의 안타까움이다. 짐짓 판에다 새겨서 후세를 기다린다.

숭정후(崇禎後) 기미(己未)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