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영사재

 

 

영사재

 

영사재(永思齋)는 진양하씨 사과공파 파조인 치천(値千) 공의 우모소(寓慕所)이다. 공은 하씨의 일파조로 어질다고 그 이름이 드러난 분이다. 1961년에 후손 동근(東根)이 종원들과 의논하여 공의 묘소 아래에 종원들의 출연금으로 효성을 다해 재실을 건립하고 영사재(永思齋)라 편액을 달았다. 겸재(謙齋)의 종후손(從後孫) 담헌 하우선(河禹善)이 지은 기문(記文)이 있다.

 

 

영사재기(永思齋記)

 

고(故) 별시위 사과 진산 하공 휘 치천(値千)의 묘는 진주 서쪽 효자리에 있다. 공은 하씨의 일파조로 어질다고 명성이 드러난 분이다. 공의 선조는 여조(麗朝)에 현달하였고 조선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여 광휘가 연이었으니 나라의 명가로 손색이 없었다. 중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씨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지라 단지 해마다 한 번 세제를 드릴 뿐 묘도의 꾸밈에 미흡함이 많았으니, 아! 이 또한 운수이로다. 대개 흥망성쇠란 사람이 피할 수 없지만 굽었다가 펴지는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이다. 이제 후손 중 본주와 각 군에 거처하는 이들은 그 집안이 자못 번창하고 인물이 훌륭하여 족히 그 문호를 일으킬 만하니 어찌 하루라도 선영을 망각하여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지난해 신축년 후손 동근(東根)이 대종과 의논하고 효성을 다해 공의 묘하에 새 정자를 세워서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매우 웅장한 재실이다. 이에 비로소 제홀, 제도, 제전, 제기, 제규가 모두 정연히 갖추어졌고 지나가는 이들이 쳐다보며 칭탄하여 공(公)이 이름 할 바를 묻기에 내 말하기를 “무릇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오직 경건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효도의 근본이요 ,전인(前人)이 이루지 못한 바를 창설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것은 효도의 전파이다. 하물며 마을 이름을 특별히 효자리라 하니 이 재사에 오르는 제족은 효제의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나 그 선조를 길이 사모하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효를 길이 생각하니 그 효성 본보기로다.’하였으니 청컨대 그 당을 영사라 편액하고 그 문을 유칙이라 하면 되겠는가!”하였다. 또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내 병으로 답하지 못하였다가 오랜 후 고하기를 “숙정은 눈이 보는 곳에 따라 생각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재사는 겉치레를 벗어나 기리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천학운립의 아취와 어조 화초의 즐김은 참으로 이 밖의 것이니 재사에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아!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처음 재사를 구입할 적에 각자 성심껏 부담했지만 제일로 마음을 다해 관여한 이는 태진(泰鎭) 창진(昌鎭)이요 맨 먼저 거금을 내어 이를 성사시킨 이는 영환(泳煥) 재근(在根)이며 시종 일을 주선하고 나에게 글을 청한 사람은 또한 동근(東根)이다.

세(歲) 병오(丙午) 병월(病月) 중한(中澣)